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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다

  • 란유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짐짓 못 들은 척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이런 홀대가 못마땅하게 느껴진 임연아는 성큼성큼 란유미한테 다가갔다. 그녀는 핏발이 선 눈으로 란유미를 쏘아보며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소윤아, 너한테는 내가 가소롭겠지만, 진짜 한번 겨루고 싶어.”
  • 그러고는 속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 ‘지금 사람들 앞에서 날 망신 주려는 수작인가?’
  • 소윤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소윤은 특별한 취미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범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소녀였다. 뭇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린 자리에서 임연아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을뿐더러 최시한한테까지 민폐를 끼치게 될 것이다.
  • 란유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요정처럼 매력적이고 달콤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래, 그렇게 하자. 뭘 겨룰 건데?”
  • 임연아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소윤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릴 작정이었다. 그래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 임연아가 옆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키며 신이 나서 제안했다.
  • “피아노 대결 어때? 소윤이 너 피아노를 잘 치잖아”
  • 란유미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소윤은 피아노를 몇 번 접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연주할 줄 아는 곡은 ‘곰 세 마리’같은 간단한 동요뿐이었다. 하지만 란유미는 피아노를 아주 잘 연주했다.
  • “좋아.”
  • 란유미가 담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흥분한 임연아가 입술을 감빨았다.
  • “소윤아, 그럼 내가 먼저 연주할게.”
  • 란유미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임연아는 피아노 앞에 마주 앉았다.
  • “그래, 네가 먼저 해.”
  • ‘불필요한 수고를 덜었군.’
  • 만약 란유미가 먼저 연주한다면 그녀의 연주를 듣고 난 임연아는 오만 가지 핑계를 대며 연주를 거부할 것이다.
  • 임연아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유명 작곡가의 명곡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를 보냈다. 임연아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 “소윤아, 내가 연주하면서 실수 좀 했어. 이제 네 차례야.”
  • 임연아가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 란유미는 침착하게 자리에 앉았다.
  • ‘피아노 대결을 하자고 한 이유가 있었네.’
  • 임연아의 연주 실력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란유미의 실력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 란유미의 가늘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에 닿았다. 음절 하나하나가 물 흐르는 것처럼 생동하고 유창하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아까 임연아가 했던 연주가 그냥 듣기 좋은 음악 소리였다면, 지금 란유미의 연주는 영혼을 가진 예술이었다.
  • 연주가 끝나고 모두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란유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분분히 감탄의 박수를 보냈다. 스미스 사모님도 앞으로 다가와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소윤 씨, 소윤 씨 연주를 듣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요. 정말 대단해요.”
  • 칭찬을 자주 하지 않는 스미스 사모님이었지만 란유미에게는 긍정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임연아는 입술을 깨물고 분노에 찬 눈빛으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분명 소윤을 망신 주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비교 대상이 되어버렸다.
  • “연아야, 난 또 네 피아노 실력이 많이 늘었을 줄 알았는데 그냥 그러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내가 잘 가르쳐 줄게.”
  • 란유미는 임연아를 비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임연아가 멈칫하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또박또박 답했다.
  • “그래, 소윤아. 난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 최시한의 의심이 한층 더 짙어졌다. 결혼 전 그는 이미 소윤의 신상을 낱낱이 조사했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어디에도 소윤이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설명은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했던 연주는 수준급 이상이었다.
  • 지금의 소윤은 그에게 신비로운 존재가 되었다.
  • 파티가 끝나고 스미스 사모님은 란유미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최식 그룹과의 협상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 최시한과 란유미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탄 최시한은 란유미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와 멀리 떨어진 좌석에 가서 앉았다. 란유미도 더 다가가지 않았다. 10 센치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몇 시간이나 서 있었던 터라 발에서 쥐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소윤, 피아노는 언제 배운 거야?”
  • 최시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 란유미는 눈을 뜨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심호흡을 길게 하고 침착하게 답했다.
  • “내가 아주 어릴 때, 엄마가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서 자주 연습했었죠.”
  • 최시한 마음속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이런 수준급 연주는 혼자 연습해서 이뤄낼 수 있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 “그럼 자격증은 있어?”
  • “아니요. 엄마가 살아 계실 때 가르쳐 주셨어요.”
  • 란유미는 살짝 긴장됐다. 이건 합리적인 설명이 못 된다. 그녀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입상한 경력도 있었다.
  • “그래.”
  • 최시한은 담담히 대꾸하고 더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란유미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불안했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야 드디어 긴장을 풀었다. 이제는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 그리고 평화로운 나날들이 흘렀다. 최시한은 매일 바빠서 밤중이 다 돼서야 집에 돌아왔고 채용박람회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란유미는 이 남자가 약속을 잊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 ‘안 돼, 120억이나 썼는데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오늘 밤엔 초대장을 달라고 해야지.’
  • 란유미는 소파에 앉아서 최시한을 기다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날 일찍 퇴근한 최시한은 여덟 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란유미는 요염한 포즈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 “여보, 설마 나랑 한 약속을 잊은 건 아니죠?”
  • 그러면서 애교스럽게 윙크까지 날렸다. 소윤에게서는 다른 여자들에게서 나는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 대신 은은한 바디워시 향이 났다. 맡으면 편해지는 향이었다. 종일 바쁜 업무에 시달렸던 최시한은 순간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 최시한이 아무 말도 없자 란유미가 애교스럽게 그의 팔짱을 꼈다.
  • “여보, 약속했잖아요. 내가…”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시한이 말을 잘랐다.
  • “따라와.”
  • 란유미는 속으로 최시한을 향해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 최시한이 서랍에서 초대장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란유미는 다급히 그것을 집어 들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어렵게 구한 초대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뒤로 돌았다.
  • 그리고 이날 그녀는 과도한 기쁨이 화를 불러온다는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꼈다. 급히 뒤를 돌아나가려던 그녀는 옆에 있던 의자에 발을 부딪치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순간 단단한 팔뚝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잡았고 란유미는 그대로 남자의 품에 쓰러졌다.
  • 란유미의 손이 남자의 부드러운 피부에 닿았다. 눈을 떠보니 최시한의 가슴을 붙잡고 있었다.
  • ‘촉감 참 괜찮네.’
  • “이거 안 놔?”
  • 최시한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란유미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뗐다.
  • “여보…”
  • 최시한이 매정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 “지금 당장 나가. 안 그러면 초대장은 없었던 일로 하지.”
  • 란유미는 입을 삐죽이며 아쉬운 표정으로 서재를 나섰다. 그녀는 최시한에게 닿았던 손을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촉감을 음미했다. 그녀는 다음번에는 최시한을 벌거벗기고 실컷 봐야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 ‘참 매력적인 몸이란 말이야.’
  • 깊은 밤, 임연아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란유미를 습격했던 두 망나니가 갑자기 나타났다. 임연아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 “부탁했던 사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