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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놀라움

  • 갑자기 든 생각에 란유미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신문을 펼쳤다. 신문 일 면에는 3일 뒤 최식 그룹에서 패션 디자이너를 공개 채용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란유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건 괜찮은 기회였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응모자는 디자이너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어야 했다. 소윤은 디자이너 자격증이 없었다. 이때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시한 씨, 나 최식 그룹 채용박람회에 나가고 싶어요.”
  • 란유미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 최시한은 냉랭한 눈빛으로 란유미를 훑어보았다. 마치, 그녀의 영혼이라도 꿰뚫어 보려는 듯이 시선으로 그녀를 압박했다. 하지만 란유미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예전의 소윤이라면 진작에 울며불며 뛰쳐나갔을 것이다.
  • 최시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담담히 물었다.
  • “소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내가 알기론 넌 디자인에 관심 없었잖아.”
  • 가슴이 철렁한 란유미가 급기야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윤은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충격으로 다시는 디자인에 손을 대지 않았다.
  • 최시한은 철저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왜 부찬이 매번 그에게는 못 당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남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 ‘두려울 게 뭐가 있어? 어차피 최시한이 조사해 봤자 이 몸은 소윤의 몸인데. 사람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빙의됐다는 이야기를 누가 믿겠어?’
  •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까의 당황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란유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최시한의 팔짱을 꼈다. 남자가 매정하게 뿌리쳤다.
  • ‘매정한 놈!’
  • 최시한의 의심을 사 골치 아픈 상황을 만들기 싫어서가 아니었다면, 그녀도 이런 얼음덩어리한테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전에는 관심 없었는데 지금 관심이 생겼어요. 그리고 채용박람회에 응모한다고 해서 꼭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냥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죠.”
  • 란유미는 일부러 얼빠진 모양으로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최시한을 쳐다보았다. 최시한은 그제야 의심이 좀 사그라졌다.
  • “꿈 깨.”
  • 남자가 한치 고민도 없이 냉정하게 거절했다.
  • ‘이럴 줄 알았어.’
  • 란유미는 이번에 최 여사를 걸고넘어졌다.
  • “그럼 할머니한테 부탁드릴래요. 할머니는 제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실걸요?”
  • 최시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따뜻한 봄날인데도 불구하고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공기가 흘러넘쳤다
  • “할머니한테 일러바친다고 해도 넌 거기 못 가.”
  • 필살기도 통하지 않았다.
  • ‘이 자식 화가 많이 났네.’
  • “시한 씨, 나도 이런 일로 할머니한테 폐 끼치기 싫어요. 이렇게 하죠. 드레스 때문에 머리 아플 텐데 내가 해결해 드릴게요. 내가 이 일을 해결하면 채용박람회에 나가게 해 줘요. 어때요?”
  • 란유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최시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란유미로 살았을 때도 잘생긴 남자를 수없이 봐 왔지만, 그런데도 감탄할 만큼 이 남자는 완벽한 외모를 가졌다.
  • ‘그래서 소윤이 그토록 이 남자에게 빠진 거겠지.’
  • 최시한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좋아, 그렇게 하지.”
  • 그는 소윤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 란유미는 곧장 최시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방으로 돌아갔다. 생전에 그녀는 스미스 사모님과 일면식이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여인이었다. 새로 한 벌 디자인하는 건 란유미에게 일도 아니었다.
  • 침실 문이 열리고 지팡이를 짚은 최 여사가 들어왔다. 최 여사는 란유미의 곁에 앉아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소윤아, 시한이 이놈은 어려서부터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래. 네가 많이 참고 양보해. 걱정하지 마, 이 할미가 잘 타이를게.”
  • 최 여사는 온화하고 성품이 인자한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정에 란유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 시한 씨를 잘 보필할게요.”
  • 최 여사가 그녀의 손을 살짝 꼬집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너 시한이를 뭐라고 불렀어?”
  • “저…”
  • 란유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기대감에 가득 차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최 여사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그이를 잘 보필할게요.”
  • ‘최시한이 원해야 부르죠.’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최시한이 똥 씹은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 “소윤아, 잘 해봐.”
  • 최 여사는 눈을 찡긋하더니 바로 자리를 떴다.
  • “당신 소윤이 아니야.”
  • 최시한이 확신에 찬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소윤은 할머니와 이런 식의 대화를 한 적이 없다. 란유미가 요염하게 웃더니 입술을 깨물며 최시한의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그녀도 미리 대비하고 접근했던지라 최시한은 쉽게 그녀를 뿌리칠 수 없었다.
  • “여보, 할머니가 저한테 당신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저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거예요. 당신만 보면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요.”
  • 란유미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즐겁게 말했다.
  • 최시한은 위협적인 태도로 차갑게 대꾸했다.
  • “가슴이 터지려면 폭탄이 있어야지. 꼭 쓴맛이 뭔지 봐야지 손을 놓겠어?”
  • 란유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놓아주었다. 사실 그녀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소윤이 원래 이런 캐릭터라 어쩔 수 없었다.
  • ‘이제 소윤은 나야. 그리고 난 최시한 당신이 날 사랑하게 만들겠어. 이렇게 되면 소윤도 소원을 이룬 셈이겠지.’
  • 최시한은 서류들을 침대에 내려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란유미는 그 서류들을 집어 들었다. 그건 스미스 사모님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 란유미가 밝게 웃었다.
  • “여보, 당신도 어느 정도는 나한테 마음이 있었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니까. 당신이 이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따낼 수 있도록 내가 도울게요.”
  • 최시한은 이를 악물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소윤,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약속은 없던 걸로 해.”
  • 란유미가 동작을 멈추고 웃음을 거두었다. 그녀는 서류를 집어 들고 자세히 읽어 보았다. 상대에 대해 많이 알아야 더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있다.
  • 그녀는 집사에게 부탁해서 그림 도구들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머릿속에 괜찮은 영감이 떠올랐다. 집사가 그림 도구들을 들고 방에 나타난 순간, 그녀는 쓰린 마음에 눈시울을 붉혔다.
  • 부찬을 위해서 그녀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살이 찢기고 뼈를 도려내는 고통뿐이었다.
  • 다시 펜을 든 란유미는 전혀 생소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숙련된 움직임으로 쓱쓱 그려 나갔다.
  • 자료에는 스미스 사모님이 파산을 한번 맞고 다시 일어섰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픔을 딛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표현하려는 느낌도 환생이었다.
  • 란유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매진했다. 방으로 들어온 최시한은 란유미가 그려놓은 디자인을 보고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그는 갑자기 이 소윤이라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 드디어 마무리를 끝낸 란유미가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자 최시한이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녀가 펜을 내려놓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당신 어떻게 왔어요?”
  • 최시한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 “소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야? 오늘 월요일이잖아. 할머니께서 묵고 가시는 날이야. 그래서 우린 한방을 써야 해.”
  • 란유미의 머릿속에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들이 떠올랐다.
  • “그럼 같이 자요.”
  • ‘어차피 전생에 못 겪어 본 것도 아니고.’
  • 그녀는 담담히 얘기를 마치고 씻으러 들어갔다. 하지만 씻고 나오자 자신의 이불은 땅에 내팽개쳐 있었고 침대에는 최시한이 누워 있었다.
  • 란유미는 이불을 발로 차고 무작정 침대에 드러누웠다. 최시한이 똥 씹은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쏘아보더니 그녀의 손을 뒤로 제치고 몸 위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