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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입맛은 언제 바뀐 거야?

  • 란유미가 가게로 들어서자 매장 직원이 공손히 그녀를 지하실로 모셨다. 진청색 캐주얼 정장 차림의 엄진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드레스는?”
  • 단호하고 깔끔한 질문이었다.
  • 엄진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이곳에 오는 여성 고객들은 모두가 그의 옷 입는 센스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눈앞에 이 낯선 여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 엄진이 직원에게 눈짓하자 직원이 옷장에서 드레스 한 벌을 꺼냈다. 란유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원단을 매만졌다.
  • 그녀는 곧바로 카드를 내밀더니 차갑게 말했다.
  • “계산은 카드로 할게요.”
  • 드레스 제작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자 그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채용박람회가 그녀에게는 새로운 출발이 될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거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최시한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이건 내가 스미스 사모님을 위해 디자인한 옷이에요. 원단도 최고급 원단으로 제작했어요. 스미스 사모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 란유미가 탁자에 놓인 박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 박스를 열어본 최시한의 두 눈이 놀라움과 감탄으로 반짝 빛났다. 디자인, 완성도 모두 일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최시한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참 차가운 인간이네.’
  • 란유미는 저도 모르게 두 팔로 몸을 감쌌다. 그녀는 나중에 겨울이 오면 최시한에게서 더 멀리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얼어 죽을 것 같았다.
  • 두 사람이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음식들은 한쪽은 소윤이 즐겨 먹는 음식, 한쪽은 최시한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깔끔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 “소윤, 입맛은 언제 바뀐 거야?”
  • 최시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비웃음 섞인 말투로 물었다.
  • “그렇게도 내 관심을 끌고 싶었어?”
  • 란유미는 또 속으로 오만 가지 욕을 퍼부었다. 소윤이 좋아하는 음식들은 그녀가 싫어하는 음식들이었다. 아무리 연기가 필요하다지만 입맛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 ‘자기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군.’
  • “아니요. 그냥 갑자기 색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서요. 예전에 먹던 것들이 좀 질렸었는데 이건 아주 맛있네요.”
  •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담담히 설명했다. 젓가락질하던 최시한의 손놀림이 잠시 멈췄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윤을 쏘아보더니 차갑게 대꾸했다.
  •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게. 허튼수작 부리지 마. 그런다고 너한테 눈길 줄 생각이 없으니까.”
  • 란유미는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했다. 자아도취도 이 정도면 병이다. 전염될 위험도 있었다. 그녀는 얼른 이 슈퍼 병원체에서 멀리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 5분 뒤, 빠르게 식사를 끝낸 란유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돌발행동이 의아하기만 했던 최시한은 그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팔목을 잡았다. 남자가 포효하는 야수처럼 으르렁거렸다.
  • “소윤, 너 도대체 무슨 수작이야?”
  • 며칠 동안 소윤이 하는 일마다 저도 모르게 관심을 두고 지켜보게 된 최시한이었다. 마치 마약에 취한 듯, 평소의 자제력을 전부 상실한 채 오로지 그녀만 쫓고 있었다.
  • 란유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안간힘을 써서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최시한의 가슴팍에 올렸다.
  • ‘촉감 좋네.’
  • “여보, 나랑 같이 자려고 온 거예요?”
  •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최시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최시한은 감전이라도 된 듯 재빨리 그녀를 뿌리쳤다. 그는 옷깃을 툭툭 털더니 경멸에 찬 눈길로 그녀를 한참 쏘아보다가 홱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 “후…”
  • 란유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표정 한번 짓는데 얼굴 근육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얼른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이른 아침, 진 집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 “소윤 씨, 도련님께서 드레스를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스미스 사모님께선 오후쯤에 도착하실 겁니다.”
  • 한창 달콤한 잠에 빠져 있던 란유미는 벌떡 일어나더니 맨발로 뛰어가서 문을 열었다. 드레스를 받은 그녀는 정교한 디자인과 원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모로 신경 썼구나.’
  • 란유미는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입어보았다. 몸매의 볼륨감을 강조한 순백의 드레스는 눈처럼 하얀 그녀의 피부를 더 빛나게 했다. 비주얼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소윤이었다. 그녀는 화장대로 다가가 옅은 화장을 하고 까맣고 긴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 란유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오후 두 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그녀가 문을 나서는데 마침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시한과 부딪혔다.
  •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 ‘문을 나서자마자 재수가 없네.’
  • “가요.”
  • 최시한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예쁘게 꾸미고 나온 소윤의 모습에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싫을 정도였다.
  •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차를 타고 파티장에 도착했다. 뮤즈 호텔은 국내에서 알아주는 일류 급 호텔이었다. 이곳에서 파티를 진행하려면 최소 한 달 전에 예약해야 했다.
  • 란유미는 침착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눈앞에 화려하고 웅장한 호텔을 바라보았다. 이 호텔의 일부 인테리어는 그녀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뮤즈 호텔의 인테리어 완공을 지켜본 초대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 그녀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은 스미스 사모님은 우아하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 “최 대표님, 도대체 누구한테 부탁해서 이런 옷을 디자인한 거예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이건 저만을 위해 만든 옷 같아요.”
  • 스미스 사모님이 미소를 머금고 궁금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 “이 디자인은 에릭의 작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요.”
  • 이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사였다.
  • 최시한은 담담한 표정의 란유미를 힐끗 보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란유미의 등을 떠밀었다.
  • “드레스는 여기 집사람이 직접 디자인했습니다.”
  • 스미스 사모님이 열정적으로 란유미를 포옹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 “고마워요. 이 드레스 정말 마음에 들어요.”
  • 란유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스미스 사모님, 저는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기뻐요.”
  • 멀지 않은 곳에서 질투와 분노에 불타는 시선이 란유미를 쏘아보고 있었다. 예리한 란유미가 등을 돌리자 진청색 드레스를 입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든 임연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봐도 싸구려 티가 나는 드레스였다.
  • ‘그놈들이 아직 임연아를 찾아가지 않은 모양이군.’
  • 놈들이 찾아갔다면 임연아가 파티장에 나타날 리 없었다.
  • 란유미는 약간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최시한의 팔을 다정하게 잡고 애교 어린 시선을 보냈다.
  • 최시한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이번 스미스 사모님과의 초대형 프로젝트는 그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 정수리 위로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차피 시작한 일, 완벽히 마무리하리라 란유미는 다짐했다. 그녀는 최시한의 팔짱을 낀 채 뒤꿈치를 들어 최시한의 얼굴에 가볍게 키스했다.
  • 이에 경악한 임연아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바닥에 쏟았다.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 광경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란유미를 최시한에게서 떨어뜨리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 입맞춤이 끝난 뒤, 란유미는 임연아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미스 사모님이 부러운 말투로 말했다.
  • “최 대표님, 복 받으셨네요. 이렇게 귀여운 부인을 옆에 두시고.”
  • 란유미는 빙그레 미소 짓고는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냉기를 내뿜고 있는 최시한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 “스미스 사모님, 과찬이세요.”
  • 말이 끝나기 바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윤아, 나랑 내기 한번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