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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난 당신 체면 같은 거 봐줄 생각이 없거든

  • 취기가 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임연아가 놈들에 이끌려 술집을 나섰다. 놈들은 그녀를 인적이 드문 막다른 골목까지 끌고 갔다. 골목에 도착하자 키 큰 망나니는 임연아의 귀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는 이 여자 때문에 그 어린 여자한테 두들겨 맞고 입원까지 했다고 생각하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 예상치 못한 한방에 임연아는 술이 확 깼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으로 뒷걸음질 치며 망나니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 “날 곱게 놓아주는 게 좋을 거야. 난 너희들이 함부로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야.”
  • 짝!
  • 망나니의 손바닥이 또 한 번 날아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이번에는 임연아의 배를 걷어차며 침을 뱉었다. 키 큰 망나니가 다시 손을 올리는데 옆에 있던 키 작은 망나니가 붙잡았다.
  • “형, 우리 오늘 미션 수행하러 온 거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자.”
  • 키 큰 망나니가 분이 덜 풀린 얼굴로 손을 내리고는 임연아의 치마를 벗기고 사진을 찍어댔다. 겁에 잔뜩 질린 임연아는 눈물, 콧물 흘리며 사정했다.
  • “내가 돈 주고 당신들한테 일을 시켰잖아. 그때는 흔쾌히 좋다고 해놓고 인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 키 큰 망나니가 코웃음 쳤다. 그날 일을 생각하니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 “그때 당신이 상대는 그냥 연약한 여자라며? 그런데 그 여자 싸움 잘하던데? 우리 그 여자한테 맞아서 온몸에 멍이 들었잖아!”
  • 순간 임연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태 소윤과 알고 지내면서 소윤이 싸움을 잘한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 “당신들 사진을 나한테 넘겨. 그 사람이 얼마를 줬으면 내가 그 두 배를 줄게.”
  • 그녀는 두 손가락을 내보이며 사정했다. 비록 알몸 사진은 아니었지만 유출되면 큰 스캔들로 이어질 것이다. 이미 최시한에게서 멀어진 마당에 이런 스캔들까지 나게 그냥 둘 수 없었다.
  • 키 큰 망나니는 듣는 둥, 마는 둥 임연아를 쏘아보더니 몸을 돌려 골목을 나갔다. 그러고는 사진들을 고스란히 란유미에게 발송했다.
  • 란유미는 한창 컴퓨터 앞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번 채용박람회는 비록 디자인 보조를 뽑는 자리였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 일터는 전쟁터와 같다. 그녀는 상대가 어떻든 최선을 다할 것이다.
  • 핸드폰 알림음이 울려서 문자를 열어 보니 임연아의 민망한 사진들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반짝이다가 핸드폰을 꺼버리고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 3일 뒤, 채용박람회가 시작되었다.
  • 수많은 참가자가 몰려든 가운데 최시한이 뭇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채용 회장에 나타났다. 란유미는 일부러 어두운 톤의 정장 차림에 모자를 눌러쓰고 조용히 입장했다. 심사위원들 속에 과연 임연아도 있었다. 란유미는 안경까지 착용하고 사람들 틈에 조용히 숨어들었다.
  • 첫 번째 심사에서 절반의 사람들이 탈락했다. 심사위원들은 디자인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점수를 매기고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을 탈락시켰다. 란유미는 순조롭게 다음
  • 심사로 넘어갔다. 디자인에 관한 전문지식을 시험 보는 자리였는데 반 시간도 안 돼 문제를 다 풀어버렸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용히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이 제출한 뒤에 제출했다.
  • 3라운드 심사에는 열 명 남짓한 사람이 남았다. 대부분 사람이 필기시험에서 탈락했다.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려면 전문지식은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다.
  • 란유미는 최대한 구석에 숨어 있었지만 최시한은 한눈에 모자를 푹 눌러쓴 그녀를 알아보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옆에서 최시한을 살피고 있던 임연아도 그 미소를 보고 란유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임연아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임연아는 평범한 차림을 한 란유미를 확인하고는 한시름 놓았다.
  • 란유미는 속으로 조용히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 마지막 심사가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 “최 대표, 디자인 보조를 공개 채용하는 자리에 왜 날 안 불렀어? 좀 구경해도 괜찮지?”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란유미는 손을 덜덜 떨며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 ‘부찬! 저 자식은 여기 왜 온 거지?’
  • 란유미는 부찬이 자신에게 했던 일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찬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 최시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 “부 대표가 사전 약속도 없이 왔으니까 따로 배웅은 안 할게.”
  • 란유미는 통쾌함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왜 부찬이 매번 최시한을 만나고 오는 날에는 똥 씹은 표정이었는지 이해가 갔다. 최시한은 말 한마디로 상대방 화를 돋우는 재주가 있었다.
  • 부찬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 “최 대표, 난 그냥 구경만 하러 온 거야. 이 정도 체면은 봐줘야 하지 않아?”
  • 최시한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부 대표, 어쩌다가 맞는 말 했네. 난 당신 체면 같은 거 봐줄 생각이 없거든.”
  • 밑에서 보고 있는 란유미는 이 순간만큼은 최시한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공개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달려가서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부찬은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 “심사 시작하겠습니다. 한 분 한 분씩 올라와 주세요.”
  • 면접관이 3라운드 심사의 시작을 알리고 응모자들은 최선을 다해 심사에 응했다.
  • 드디어 란유미의 차례가 돌아오자 그녀는 손에 땀이 찼다. 긴장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는 부찬이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여태 조용히 있던 최시한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 “디자인을 배우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 란유미는 잠시 멈칫하다가 머릿속에 자신이 어릴 적 디자인을 처음 배우던 추억을 떠올리고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바람이 불면서 모자가 땅에 떨어졌다.
  • 란유미의 얼굴을 확인한 부찬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 ‘저 눈빛, 너무 닮았어.’
  • “저는 거대한 꿈을 위해 디자인을 배우고 싶은 건 아닙니다. 단지 디자인 작업을 하는 과정이 너무 즐겁고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더 배우고 싶습니다.”
  • 이런 말은 면접관들이 면접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지만 란유미의 진솔한 말투와 확고한 눈빛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 모자가 벗겨지는 순간부터 임연아는 그녀를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이 끝나자 임연아는 벌떡 일어서서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 “저는 탈락시키겠습니다. 이유가 너무 성의 없어요.”
  • ‘저렇게 흥분하는 걸 보니 날 알아본 모양이군.’
  • 란유미는 안경을 벗고 한마디 덧붙였다.
  • “저는 가장 진솔한 생각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 그녀는 공손히 머리를 숙여 다른 면접관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 부찬은 어두운 눈빛으로 란유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영혼이라도 꿰뚫어 보려는 듯이.
  • “전 합격입니다.”
  • 면접관 한 명이 입을 열자 다른 사람들도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 “최 대표님, 최 대표님께서 결정해 주세요. 소윤이는 우리 회사와 어울리지…”
  • 임연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시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 “합격.”
  • 란유미는 아무런 감흥 없는 눈빛이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 “아가씨, 우리 본 적 있죠?”
  • 부찬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한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다.
  • 란유미의 두 눈에 증오의 감정이 스쳤다.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