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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이건 에릭 작품이 아니에요

  • 소윤은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조용히 임연아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 그녀의 기억에는 드레스를 입어 보라고 소윤에게 제안한 건 임연아였다. 단순 무식한 소윤은 명품 드레스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 그날 임연아가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최시한은 성숙하고 섹시한 여자를 좋아하며, 저 드레스가 어울리는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여자라고 드레스를 감탄했다며 속삭였다. 그리고 멍청한 소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 커피는 임연아가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그리고 커피를 쏟은 것도 임연아가 뒤에서 그녀를 밀쳐서 벌어진 일이다. 옷이 찢어진 것도 소윤이 갑작스럽게 바닥으로 넘어지며 삐져나와 있던 철사에 옷깃이 걸려 찢어진 것이다.
  • ‘이 여자…머리에 온통 남을 해칠 생각뿐이군.’
  • 처음부터 임연아는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이유로 소윤에게 접근했고 소윤을 위하는 척 옆에서 소윤을 부추겼다. 순진하고 단순했던 소윤은 성격이 좀 괴팍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망나니는 아니었다. 하지만 임연아가 옆에서 온갖 못된 수단과 방법을 제안하는 바람에 소윤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간 것이다. 그렇게 소윤은 최 여사를 제외한 최씨 집안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는 존재가 되었다.
  • 만약 진짜 소윤이었다면 임연아가 자신에게 드레스를 입어 보라 부추겼다는 변명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 때문에 임연아까지 피해를 봤다고 미안해했을 것이다.
  • 최시한은 분노에 찬 시선으로 조용히 듣고만 있는 여자를 쏘아보았다.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 “소윤, 이 일 네가 그런 거 맞지?”
  • 임연아는 긴장한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 어린 눈빛 속에 의기양양함도 스쳤다.
  • 임연아는 아까 장례식장에서 자신을 골탕 먹인 사람이 소윤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 드레스에 손을 쓴 건 자신인데 소윤은 무사하고 자신만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다.
  • 어찌 됐건, 더는 소윤을 이대로 편하게 그냥 둘 수 없었다.
  • 소윤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옷깃을 찢은 거 맞고, 옷에 커피를 쏟은 사람도 나예요.”
  • 비록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잘못한 건 인정해야 했다.
  • 임연아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하지만 곧이어 소윤은 그녀를 지목했다.
  • “하지만 드레스는 연아가 입어 보라고 시킨 거예요.”
  • “거짓말하지 마!”
  • 임연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변명했다.
  • “최 대표님, 전 그런 말을 한 적 없어요. 소윤의 말을 믿지 마세요. 쟤 지금 절 모함하는 거예요… 소윤아, 우리 친구잖아. 왜 이렇게 날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야?”
  • “임연아,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최시한은 섹시하고 성숙한 여자를 좋아한다며? 너 또 그랬잖아? 스미스 사모님 몸매가 예술이라며 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섹시해서 최시한이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며? 나한테 최시한을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 것 같으니까 조심하라고 네가 그랬잖아. 그래서 특별히 드레스를 가져와 나보고 입어 보라면서.”
  • 소윤이 큰소리로 얘기했다.
  • “그리고 최시한은 가슴이 큰 여자를 좋아한다며…”
  • “나 아니야.”
  • 임연아가 울먹이며 반박했다. 고개를 돌리자 최시한의 추궁하는듯한 예리한 눈빛에 바늘방석에 앉은 듯 온몸이 떨렸다. 그녀는 끝내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 “최 대표님, 저는 이 몇 년 동안 회사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런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했겠어요?”
  • “너 많은 말을 했지. 하마터면 나 대신 최시한 침대에 기어 들어갈 뻔했잖아. 녹음이라도 틀어 줘?”
  • “소윤, 입 닥쳐!”
  • 최시한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눈빛으로 소윤을 쏘아보았다.
  • “지금 선택해. 3일 안에 드레스를 원래대로 돌려놓든가, 에릭이 직접 제작한 드레스를 찾아오든가.”
  • 최시한이 차갑게 명령했다.
  • “우선, 드레스는 임연아가 나한테 가져다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책임도 임연아가 져야죠.”
  • 란유미가 입을 삐죽이며 담담히 답했다.
  • “최 대표님, 소윤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제 잘못이에요. 소윤이가 드레스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한다고 그 드레스를 소윤이에게 건네준 제가 잘못했어요. 벌하실 거면 저를 벌하세요. 에릭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소윤이가 무슨 수로 에릭이 직접 제작하고 스미스 사모님에게 딱 맞는 사이즈의 드레스를 구해 오겠어요.”
  • 임연아가 나서서 사정했다.
  • 이 상황에서는 먼저 한발 물러나는 게 나았다. 소윤이 아무리 설명해도 최시한은 믿지 않을 테니까.
  • 물론 최시한을 포함한 최씨 집안 모든 사람이 소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소윤은 그들 눈에 항상 사고만 치고 다니며 최씨 집안에 폐만 끼치는 민폐덩어리일 뿐이었다.
  • 란유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임연아가 가져온 드레스를 눈여겨 살폈다.
  • “에릭이 이 드레스를 본다면 화가 나서 프랑스에서 널 죽이려 날아올 거야. 임연아.”
  • “뭐라고? 소윤아, 드레스는 네가 망가뜨린 거 맞잖아. 그냥 솔직하게 인정해. 내가 최 대표님께 널 용서해 주라고 사정해볼 테니까.”
  • ‘감히 모든 책임을 나한테 떠넘겨?’
  • 임연아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에릭한테 널 용서해달라고 사정하지 않을 거야.”
  • 란유미가 차갑게 대꾸했다.
  • “너…”
  • 드레스를 유심히 살펴본 란유미는 전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한눈에 이 드레스가 에릭의 작품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 “이건 에릭이 디자인한 드레스가 아니야. 임연아, 너 머리만 나쁜 줄 알았는데 안목도 형편없구나.”
  • “그럴 리 없어.”
  • 최시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벼랑 끝에 몰린 소윤이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다니.’
  • “넌 패션 디자인을 배운 적도 없고 에릭의 작품을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게 에릭 작품이 아니라고 장담해?”
  • 임연아가 옆에서 한술 더 떴다.
  • “그래, 소윤아. 너 에릭의 작품이 뭔지나 알아?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야. 에릭은 절대 같은 드레스를 두 벌 만들지 않아. 그의 작품은 유일한 거야. 너 이게 에릭 작품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거야?”
  • 이 드레스는 임연아가 프랑스까지 날아가서 반달을 공을 들여서야 겨우 얻어낸 작품이었다. 제작비만 몇억이 들었고 기타 재료비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에릭을 직접 만나고 온 건 아니었지만 이런 독특한 디자인을 내놓을 디자이너는 에릭 외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 최시한의 표정이 점점 더 얼어붙었다.
  • “그 말 진짜야? 만약 합리적인 해명을 내놓지 못하면 네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 란유미는 한참 입술을 깨물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 “우선 에릭은 드레스를 디자인할 때, 이런 저가의 다이아몬드로 포인트를 주지 않아요. 에릭한테 이런 쌀알만 한 다이아몬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싸구려일 뿐이에요. 그리고 시중에 이런 다이아몬드는 널리고 널렸죠. 1캐럿이 되지 않는 다이아몬드는 소장 가치가 없어요. 하지만 에릭이 디자인한 드레스들은 전부 소장 가치가 있는 예술품들이죠.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싸구려 다이아몬드를 포인트로 쓰겠어요?”
  • “그건 에릭이 이 드레스에는 이런 작은 다이아몬드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수 있잖아. 넌 패션 디자인이 무슨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아? 너 같은 속물들은 예술이 뭔지 몰라서 그래.”
  • 임연아가 급히 반박했다.
  • 란유미는 그냥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녀의 눈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 “네가 틀렸어. 에릭은 다이아몬드보다 에레메이파이트를 더 좋아해. 그건 아주 희귀한 보석이야. 유리알 같이 투명한 광택은 그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고급스러워. 에릭은 그런 보석들을 좋아하고 이런 쌀알 다이아몬드를 극도로 싫어해. 믿을 수 없다면 가서 물어봐.”
  • “물론, 그래도 믿지 못하겠으면 한가지 얘기할 게 더 있어요. 이 드레스의 수공 바느질 기법은 에릭이 자주 쓰는 기법이 아니에요.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바느질 기법을 가지고 있고, 그게 에릭의 트레이드마크예요. 믿지 못하겠으면 전시회에 전시된 작품들을 가서 확인해 봐요.”
  • “그럴 리 없어.”
  • 임연아는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최시한은 희비를 가릴 수 없는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바느질 기법에 대해서는 최시한도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지 못했으니 그도 에릭의 독특한 바느질 기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 “소윤, 너 거짓말하지 마. 그럴 리가 없어. 너 이러면 최 대표님이 믿어 주실 것 같아?”
  • 임연아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 “그게 진짜라면 어떻게 할 거야?”
  • “만약 진짜라면 난 회사를 사직하고 패션계를 떠나겠어.”
  • 임연아가 악에 받쳐 선전포고했다.
  • “그래. 그럼 진짜가 아니면 난… 최씨 가문을 떠날게. 어때?”
  • 이건 참으로 유혹적인 조건이었다. 임연아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 최시한은 소윤을 힐끗 흘기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 “임연아, 가서 전시회를 주최했던 진 관장을 모시고 와. 그분은 에릭을 만나 보셨으니까 에릭의 작품을 알아볼 거야.”
  • 소윤을 최씨 가문에서 쫓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임연아는 날아갈 것 같았다. 그녀는 곧장 진 관장의 저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