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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란유미의 장례식

  • 란유미는 소스라치며 악몽에서 깼다.
  • 창밖에서 따스한 햇살이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화려한 침실을 둘러본 그녀는 잠시 넋을 잃었다.
  • ‘꿈이 아니었구나…’
  • 그녀는 진짜 환생한 것이다.
  • 임연아가 문밖에서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란유미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가서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씻었다. 그러고는 욕실 가운을 챙겨입고 방으로 나와 옷장을 뒤졌다.
  • 옷장에는 전부 노출이 심한 섹시한 스타일의 옷뿐이었다.
  • ‘입고 나갈만한 옷이 없네.’
  •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끝내 구석에서 비교적 심플한 검정색 민소매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 “소윤아, 여사님이 보내 주신 옷이야. 어서 입어봐.”
  • 임윤아는 곁눈질로 그녀의 볼륨감 있는 몸매를 흘겨보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흰색 박스를 건넸다.
  • 박스를 열자 안에는 소박한 느낌의 하얀색 하이넥 롱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심플한 디자인의 보수적이면서도 우아한 느낌의 드레스였다. 아마 소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최 여사님이 장례식에 이상한 차림으로 나타나서 망신당할까 봐 미리 준비한 것 같았다.
  • ‘뭘 입고 가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잘됐네.’
  • 옆에서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지켜보는 임연아의 눈에 괴이한 표정이 스쳤다. 옷을 건네받은 란유미는 손끝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감탄했다. 심플한 디자인이 소윤의 가녀린 몸매를 더욱더 두드러지게 받쳐 줄 것이다. 드레스의 뒤쪽에는 연꽃 모양의 버클이 달려 있었는데 꽃잎들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정교하게 바느질되어 있었다. 버클 아래쪽은 화려한 레이스로 포인트를 주어 마감했다. 버클을 하나씩 잠그던 그녀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 임연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 “이 옷, 할머니가 보내신 거 맞아?”
  • 란유미가 갑자기 물었다.
  • “그, 그럼.”
  • 임연아가 시선을 회피하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 란유미는 임연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 “아니야. 할머니께 고맙다고 인사 전해드려.”
  • 임연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쥔 손에 힘을 풀더니, 란유미의 시선을 피해 냉소를 지었다.
  • ‘이 멍청한 년한테 다 들킨 줄 알았네!’
  • 정교한 물건일수록 망가뜨리기 쉬운 법이다.
  • 이 롱드레스는 임연아가 밤을 지새우며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선물이었다. 버클과 레이스 주변의 박음질들은 그녀가 손을 봐둔 상태였다.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 없어 보이고 입었을 때도 별일 없었다.
  • 하지만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고인을 향해 애도의 절을 올려야 한다. 소윤이 절을 하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버클과 레이스는 후두둑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윤은 뭇사람들 앞에서 또 한번 개망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장례식장에서.
  • 이미 명성이 추락할 대로 추락한 여자에게 이런 망신은 평생 가도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 옷을 갈아입은 란유미는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옅은 화장을 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임연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짙은 화장과 노출이 심한 옷 대신 청순하고 소박한 차림을 한 소윤에게서는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 임연아는 눈을 끔뻑이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빛 속에 불타오르는 질투심은 숨길 수 없었다. 사실 임연아는 예전부터 소윤이 남들의 질투를 살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소윤이 짙은 화장을 하고 노출이 심한 옷들을 입기 시작한 것도 임연아의 입바람 때문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최시한이 섹시하고 개방적인 여자를 좋아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을 뿐인데, 이 멍청한 여자는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 임연아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는데 등에 툭 하고 무언가 닿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자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녀의 등 뒤에서 란유미가 차가운 표정으로 바느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 예상 밖으로 그녀를 데리러 나온 사람은 최시한이었다!
  •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냉기가 뚝뚝 흐르는 표정, 슈트 차림을 한 남자는 서 있기만 하는데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란유미가 다가가자 그는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금세 의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란유미는 대범하게 최시한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고 자신보다 월등히 큰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비록 최시한한테 아무런 느낌도 없는 란유미였지만, 이 남자 참 완벽한 사람이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 왜 부씨 가문에서 그렇게 최시한을 미워하면서도 속수무책이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의아한 표정도 잠시, 최시한은 다시 굳은 표정을 짓더니 차갑게 명령했다.
  • “타!”
  • 눈빛 속에 담긴 혐오와 경멸의 감정은 여전했다.
  • 란유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최시한은 아직도 어젯밤 일로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고한 그녀는 그의 화풀이 상대가 되고 말았다.
  • ‘소윤의 몸을 빌려 환생했으니 어쩔 수 없지.’
  • 최시한이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란유미도 그를 더 자극할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뒷좌석의 차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안에서 자상한 얼굴을 한 최 여사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 “최…할머니!”
  • 최 여사가 눈꼬리가 휘게 미소 지었다.
  • “소윤아, 앞에 타.”
  • 란유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가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 순간 섬뜩한 살기가 그녀를 덮치고, 그녀는 하마터면 놀라서 도망갈 뻔했다.
  • 결국 최시한은 그녀를 내쫓지는 않았다. 아마 뒷좌석에 타고 있는 최 여사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짜증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꾹 참고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다.
  • 소문에 최시한은 지극한 효자라더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 란유미는 잘 믿어지지 않았다. 이토록 차갑고 냉정한 남자가 백발이 성성한 구부정한 노인 앞에서는 효심이 지극한 손자라니. 심지어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X 시티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소윤을 아내로 맞았다.
  • 비록 명의상일 뿐이지만.
  • 가는 내내 란유미는 얼음 창고에 갇힌 듯 고통스러웠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고 차 안에는 무겁고 괴이한 분위기가 흘렀다. 최시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조수석에 앉은 그녀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 란유미의 장례식은 근교의 부씨 가문 장원에서 치뤄졌다. 장원 문밖에는 수많은 외제 차가 줄지어 서 있었고, 문 앞에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화환들이 놓여 있었다. 무겁고 슬픈 분위기가 온 장원에 흘러넘쳤다.
  • 차에서 내린 란유미는 가슴에 돌덩이라도 얹은 듯 숨이 막히고 눈앞이 새카매지더니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 이때, 단단한 팔이 그녀를 부축했다. 고개를 들자 최시한이 급히 손을 거두어들이고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 “오늘은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있다 가는 게 좋을 거야!”
  • 경고이자, 으름장이었다.
  • 란유미는 목을 웅크린 채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두 주먹에 소리 없이 힘을 주었다. 이제 곧…부찬과 란지희 두 연놈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온몸에 치가 떨렸다.
  •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 열여덟 살 나던 해 그녀는 처음 알았고, 유학마저 포기하고 부식 그룹에 취직했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그에게 수많은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었다. 결혼 후 그에게 그런 모욕과 학대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가 지극히 아꼈던 이복동생 란지희, 악마보다도 더 지독한 가식적인 년. 이런 사람 같지 않은 연놈들에게 정을 준 자신이 한없이 수치스러웠다.
  • 그녀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빼앗아 간 연놈들이 그녀를 위한 장례식을 진행하고 있다!
  • ‘자기들이 죽여놓고 이게 무슨 수작이지?’
  • 그녀는 부찬과 란지희가 또 무슨 짓을 꾸미는지 똑똑히 지켜보리라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