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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임연아의 자업자득

  • 란유미와 임연아가 양쪽에서 최 여사를 부축하고 최시한의 뒤를 따라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최씨 가문 사람들의 등장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던 부씨 가문 사람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X 시티 사람이라면 부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라이벌 관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 부씨 가문 사모님의 장례식장에 최씨 가문에서 조문을 왔다. 그것도 최 여사와 최시한까지 등장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특히 최시한은 온몸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어 부씨 가문 사람들은 감히 나서서 제지할 수도 없었다. 주변에 있던 조문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최 여사와 임연아는 다들 잘 알고 있었지만 유독 최시한 옆을 지키고 있는 여자가 너무 낯설었다.
  • 사람들은 최시한과 아내 소윤의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안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최시한이 대놓고 저런 미인과 동행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건 최씨 가문에서 소윤의 위치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말해 주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머지않아 최씨 가문 사모님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것이라며.
  • 란유미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어 수많은 조문객 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그녀는 드디어 가식적인 얼굴을 한 란지희를 알아볼 수 있었다.
  • 란지희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란유미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절규하고 있었다.
  • “언니, 이제 일어나요. 언니 제발 눈을 떠요, 응? 언니의 심장 같은 건 필요 없단 말이에요. 언니가 살아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주완영이 얼른 손을 내밀어 눈물범벅이 된 딸을 끌어안았다. 눈시울을 붉힌 그녀는 흐느끼며 딸을 위로했다.
  • “지희야, 속상해하지 마… 언니는 이미 떠났어. 유미의 가장 큰 소원이 네가 건강히 살아가는 거였잖아. 그러니까 속상해하지 마…”
  • 란지희는 무슨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주완영의 손을 뿌리치더니 란유미의 관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 이 모습을 본 조문객들도 자매의 깊은 우애에 눈물을 훔쳤다. 최 여사는 차갑게 식은 며느리의 손을 토닥이며 탄식했다.
  • “유미 저 어린 것이 이렇게 갑자기 가버리다니… 하늘도 참 매정하지. 그래도 온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어.”
  • 란유미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 ‘편히 눈을 감는다고? 남편과 동생에게 산채로 가슴이 찢기고 원한을 품고 죽었는데, 이런 억울한 죽음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고?’
  • “할머니, 속상해하지 마세요. 이제 란유미 씨에게 작별 인사하러 가요.”
  •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란유미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죽어서도 이 집안사람들과 엮이기 싫었다.
  • 인사하러 가자는 말에 임연아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란유미의 뒤쪽으로 가더니 그녀의 등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 ‘잘됐어!’
  • 임연아는 흥분한 나머지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 최시한이 란유미를 힐끗 바라보았다. 오늘 이 여자는 시종일관 대범한 모습을 보였고 평소처럼 사고도 치지 않았다. 그는 약간 수상한 마음이 들었다. 옆에 있는 여자가 어딘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 유가족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임연아는 란유미의 등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망신을 당하는 모습을 한순간이라도 놓치기 싫다는 듯이.
  • 저 드레스는 임연아 자신이 직접 손을 본 작품이다. 절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임연아의 기대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 란유미는 허리를 숙여 절을 한 뒤,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임연아를 돌아보았다. 임연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알고 있었어?!’
  • ‘어떻게? 저 멍청이가 알아챘다고 해도 오는 내내 잘 감시하고 있었는데… 소윤은 드레스를 입은 뒤 한 번도 벗은 적이 없는데 언제 바느질한 거지?’
  • 충격과 소윤의 비웃음 섞인 미소에 임연아는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한창 넋이 나가 있는데 무언가 그녀의 발아래에 닿았고 하이힐이 미끄러지면서 임연아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 이 소동에 장례식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쏠렸다. 임연아는 그대로 대자로 넘어졌다. 더 최악인 것은 입고 있던 검은색 드레스의 지퍼가 “찍-”하는 소리와 함께 찢겨나갔다는 것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임연아가 황급히 손을 들어 등 뒤를 가렸지만 이미 모든 사람이 이 꼴을 목격한 뒤였다. 심지어 어떤 남자들은 핸드폰으로 이 장면을 찰칵찰칵 찍기까지 했다.
  • “보지 마세요…찍지 마세요!”
  • 임연아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 일어나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한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러는 도중에 치맛자락에 발이 걸려 또 한 번 흉한 몰골로 넘어졌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임연아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 최 여사는 분노에 몸을 떨며 쓰러져 있는 임연아를 향해 호통쳤다.
  • “최씨 가문 망신은 네가 다 시키는구나. 어서 일어나서 꺼지지 못해!”
  • 놀란 임연아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 “여사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 그녀는 옆에 있는 란유미를 쏘아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변명했다.
  • “여사님, 다 쟤가 그런 거예요. 저년이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요. 저 진짜 억울해요…”
  • 갑작스러운 전개에 최 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최시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낮게 물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이게 다 소윤이 수작이에요. 아침에 소윤이가 제 옷을 들고 있는 것을 봤거든요. 저는 쟤가 일부러 제 옷에 수작을 부린 것도 모르고… 일부러 절 망신시키고 최씨 가문을 욕보이려는 수작이에요. 최 대표님, 여사님, 다 저 여자 짓이에요…”
  • 란유미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 “연아야,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최씨 가문 별장 곳곳에 CCTV가 있어. 너 아침에 옷을 다 차려입고 날 찾아왔잖아. 네가 옷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네 옷에 손을 댔다는 거야?”
  • “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그런 짓을 했겠니? 아니면 네 머리에 물이 들어찬 거니?”
  • 란유미가 코웃음 쳤다.
  • “다 네가 한 거야. 너 말고 또 누가 이런 짓을 했겠어? 너 진작 알고 있었지? 네가 일부러 그런 거야!”
  • 임연아는 말문이 막혔지만 조금 전에 초라한 몰골로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 당한 것을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끝까지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소윤을 물고 늘어질 기세였다.
  • 최 여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통쳤다.
  • “입 닥쳐!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애먼 사람을 모함해? 너랑 소윤이 가장 친한 친구 사이 아니었니? 소윤이가 왜 널 해치려 들겠니? 무슨 일인지는 집에 가서 CCTV를 돌려 보면 알겠지. 당장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 최시한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던 임연아는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자 어깨를 흠칫 떨더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임연아는 풀이 잔뜩 죽어 초라한 몰골로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 자업자득이란 말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 란유미는 임연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옆에서 불편할 정도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란유미가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인지 최시한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 그의 까만 눈동자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란유미가 애써 담담하게 요염한 미소로 답하자 최시한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지금의 신분은 소윤이었다. 뻔뻔하고 남자에게 매달리기 좋아하는 가식덩어리. 자칫 잘못했다가는 언젠가는 덜미를 잡힐 것이 분명했다.
  • 임연아의 소동은 금세 가라앉았다. 어차피 일반 신분의 여자라 좀 예쁘장하긴 했지만, 그냥 눈길 한 번 더 줄 정도였다.
  • 그리고 어쨌든 이곳은 부씨 가문의 장원이었다.
  • 부씨 가문 친인척들이 다녀간 후, 란씨 가문 사람들도 육속 도착했다. 란정혁은 관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 생기를 잃은 딸의 얼굴을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한편으로는 딸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남편의 눈치도 살피느라 주완영은 바쁘게 돌아쳤다. 위로의 말이라고 해봐야 식상한 몇 마디 뿐이었지만.
  • 란유미는 조용히 그들 주변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한때는 가족이었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란정혁은 그다지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친딸의 돌연사에 부찬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다는 이유를 내놓았다. 사후에 심장을 동생 란지희에게 이식해 달라는 유서까지 남긴 상황이라 란정혁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두 딸 사이가 유별났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 유미는 전처가 낳은 딸이었다. 전처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주완영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 뒤로 란유미는 전처럼 아버지를 따르지 않았다. 매번 이상한 눈빛으로 란정혁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가끔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 그리고 지금, 그 딸이 세상을 떠났다.
  • 그리고 귀엽고 애교 많은 막내딸은 그녀의 죽음으로 새 심장을 얻고 살아남았다.
  • 한 사람의 목숨으로 다른 한 사람을 살린 셈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이런 상황에서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란정혁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란 아저씨.”
  • 란정혁이 장례식장 구석에서 담배를 꺼내 무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름답고 우아한 외모의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 란정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누구시죠?”
  • “전 유미 친구예요.”
  • 란유미가 답했다. 그녀는 약간 주저하는 말투로 물었다.
  • “아저씨, 잘 살고 있던 유미가 왜 갑자기 자살을 선택했을까요? 경찰에서 부검은 했나요?”
  • 란정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 란유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누르며 답했다.
  • “아저씨, 유미의 죽음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 란정혁이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을 하려는데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 “뭐가 이상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