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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망신을 자초하다

  •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란유미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부찬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죄송합니다. 전 잘 모르겠는데요.”
  • 하지만 눈치 빠른 부찬은 그녀의 눈빛에 스치고 지나간 증오의 감정을 알아챘다.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데 이 여자의 증오는 어디서 온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그리고 이 여자는 누군가와 너무 닮았다…
  •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 “부식 그룹의 디자이너가 될 생각은 없으신가요? 최식 그룹에서 드리는 대우의 두 배를 드리죠.”
  • 란유미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사실 부식 그룹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니 부찬이 제시한 두 배의 대우도 그녀에게는 하찮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원하는 건 부식 그룹이 망하고 부찬이 거지가 돼서 길거리에 나앉은 것이었으니까!
  •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차갑게 답했다.
  • “부 대표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식 그룹에서 발전하고 싶습니다.”
  • 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부찬과 마주 보았다.
  • 부차는 순간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유미야…”
  • 란유미도 덩달아 당황했지만 바로 침착한 표정을 짓고는 최시한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최시한이 들고 있는 직원 카드를 건네받았다. 목표와 한 발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 심사위원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임연아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결과가 너무 내키지 않았지만 최시한 앞에서는 참아야 했다.
  • 란유미는 계약서를 자세히 읽어보았다. 월급을 확인한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2백만 원에서 천만 원 정도였다. 이 돈으로는 하려던 일을 할 수 없다.
  • 예전에 란유미로 살 때는 수많은 회사에서 월 수억의 급여를 제시해도 전부 거절했었는데, 얼굴이 바뀌고 자격증이 없으니 대우도 천지 차이였다.
  • 란유미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통쾌하게 사인했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복수는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
  • 채용박람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스미스 사모님이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며 천천히 다가왔다. 부찬이 미소 띤 얼굴로 스미스 사모님한테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스미스 사모님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란유미는 속이 다 시원했다. 그녀는 스미스 사모님에게 감사의 표시로 옷을 몇 벌 더 만들어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 “소윤 씨,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요.”
  • 스미스 사모님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란유미를 포옹했다. 란유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스미스 사모님, 어떻게 오셨어요?”
  • “저쪽에 있는 레스토랑 인테리어를 내가 직접 했어요. 그래서 해마다 한 번씩 보러 와요.”
  • 말을 마친 스미스 사모님이 소윤을 이끌었다.
  • “소윤 씨도 같이 가요. 시한 씨도요.”
  • 옆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최시한이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고는 란유미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 란유미가 주목받는 모습을 분노에 찬 눈길로 쏘아보던 임연아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더니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스미스 사모님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스미스 사모님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임연아의 손이 어색하게 허공에서 멈췄다.
  • “우리 저쪽으로 가요.”
  • 스미스 사모님이 냉랭한 시선으로 임연아를 한번 쳐다보더니 란유미를 향해 말했다. 스미스 사모님은 낯선 사람이거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내미는 손길은 항상 무시로 일관했다.
  • 임연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바르게 손을 내린 그녀는 체면 따위는 잠시 제쳐두고 급히 입을 열었다.
  • “스미스 사모님, 소윤은 가식적이고 위험한 여자예요. 절대 저 순진한 외모에 넘어가시면 안 돼요.”
  • 란유미가 순간 미간을 찌푸렸지만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스미스 사모님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걷고 있었다. 임연아처럼 멍청한 여자는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 하지만 임연아는 포기하지 않고 뒤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참다못한 스미스 사모님이 란유미의 손을 토닥이더니 차가운 얼굴로 임연아를 향해 돌아섰다.
  • “아까부터 열심히 떠들어대던데, 지금 내가 안목이 형편없어서 소윤과 가깝게 지낸다는 얘기인가요?”
  • 임연아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어색하게 고개를 흔들며 변명했다.
  • “아, 아닙니다. 스미스 사모님, 제 말은 저 여자한테 속지 말라는 얘기였어요. 소윤은 진짜 나쁜 여자예요.”
  • “그 말은,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동태눈깔을 진주로 떠받든다는 얘기처럼 들리네요.”
  • 스미스 사모님이 냉랭하게 답했다.
  • “난 한 번도 사람을 잘못 본 적 없어요. 내가 보기엔 소윤이 진주고 그쪽이 동태눈깔이네요. 계속 떠들어대면 당신을 무고죄로 신고할 거예요.”
  • 순간 란유미는 가슴이 뭉클했다. 아끼던 이복동생마저 그녀를 이용하기 급급했고 심장을 빼앗기 위해 그녀를 살해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따뜻한 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란유미였다. 하지만 오늘 스미스 사모님에게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이 느껴졌다.
  • 부찬이 야릇한 눈길로 란유미를 훑다가 뒤따라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스미스 사모님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명함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 “스미스 사모님, 저는 부식 그룹 대표 부찬이라고 합니다. 사모님께서 S 시티에 갖고 계신 땅에 관해서 의논하고 싶습니다.”
  • ‘이 자식 또 예의 바른 척 연기하고 있네.’
  • 애초에 왜 이런 짐승 같은 놈을 사랑하게 됐는지 란유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 ‘눈이 멀었었지!’
  • 스미스 사모님은 미소 띤 얼굴로 란유미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 “소윤 씨, 명함 좀 대신 받아 줄래요?”
  • 란유미는 역겨움을 가까스로 참으며 명함을 건네받았다.
  • 스미스 사모님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부찬을 향해 말했다.
  • “부 대표님, 그 땅은 아직 팔 생각이 없어서요. 나중에 팔 의향이 생기면 다시 연락 드릴게요.”
  • 부찬은 경직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딱딱하게 말했다.
  • “그래요,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말을 마친 부찬은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떴다.
  • 부찬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부식 그룹 대표로서 오늘 여러 차례 무시를 당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 란유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 “스미스 사모님, 설마 진짜 저 사람한테 연락하실 건 아니죠?”
  • 그녀는 부찬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게 그냥 두기 싫었다. 저런 짐승 같은 놈한테 기회를 줄 수 없었다.
  • 스미스 사모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맞은 편에 조용히 앉아 있는 최시한을 바라보았다.
  • “이미 최 대표님과 계약서까지 썼는데요. 이 땅은 이제 시한 씨 소유예요. 그래서 저 사람이 사고 싶어도 이제 제 손을 떠났는걸요.”
  • 최시한은 잔을 들어 커피 한 모금 마셨다.
  • ‘어쩐지 부찬이 땅 얘기를 꺼냈을 때 담담하더라니. 능구렁이가 따로 없네.’
  • 란유미가 속으로 생각했다.
  • “스미스 사모님, 저희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 최시한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란유미를 응시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란유미는 가볍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레스토랑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식사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기 싫어서였다.
  • “시한 씨, 먼저 가요. 난 아직 일이 남아서. 스미스 사모님이랑 수다 좀 떨다가 갈래요. 걱정 마세요. 집에는 늦지 않게 들어갈게요.”
  • 란유미가 최시한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 최시한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 ‘이제 여보라고 부르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