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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홀가분하다

  • “이거 진짜 꿈 아니겠지?”
  • 안영미는 침대에 누워 서류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이때 안영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유시현이 차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생각났다.
  • 유시현은 뭐든 줄 수 있지만 유독 그녀한테 정은 줄 수 없다고 했다.
  • 사실 생각해 보면 그녀도 마찬가지다.
  • 2년 전, 치욕스러운 배신을 당한 후 그녀는 남자에 대한 어떠한 감정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 심지어 그녀는 이제 평생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소개팅에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 두 사람이 소개팅을 한 이유는 모두 자신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제시해 어떠한 감정도 없었기 때문이다.
  • 결혼이란 단지 남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 이렇게 생각하니 안영미는 조금 홀가분해졌다.
  • 그녀가 유시현과 혼인 신고를 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이 혼인의 본질은 그녀가 전에 계획했던 대로 사랑 없이 대충 짝을 맞춰 사는 것이었다.
  • 그녀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 안영미는 스스로 위안을 한 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다.
  • 그녀가 깨어났을 땐 이미 오후 5시가 넘어 해가 질 무렵이었다.
  • 안영미는 눈을 비비며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모습이었다.
  • “시현 씨, 맞죠? 들어와요. 물 좀 마시고 여기 사과 좀 먹어요. 내가 다 오늘 사 온 거라 참 신선해요.”
  • 안영미가 흐리멍덩하게 더 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나는 엄마의 친절한 목소리에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 시현 씨? 물 마셔요? 사과 먹어요?
  • 집에 손님이 온 건가?
  • 안영미는 머리를 긁적거리다 뒤늦게야 유시현이 집에 온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 설마 이 시현 씨가 바로 유 대표님?
  • 안영미는 쏜살같이 방문을 열고 뛰어나가다가 과일을 들고 문을 두드리려는 유 여사를 들이받았다.
  • 유 여사는 허둥지둥하는 딸을 째려보다 얼굴을 돌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 “영미야, 너 마침 잘 나왔구나. 시현 씨가 오셨어. 어서 가서 얘기 좀 나누렴.”
  • 엄마의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안영미는 무심코 벽에 있는 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이 딱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그가 정말 왔다! 그것도 제시간에 맞춰서 왔다!
  • 안영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유 여사는 이를 눈치채고 그녀의 팔을 붙잡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유시현의 앞으로 데려갔다.
  • “얘기 좀 나누세요. 나는 저녁 준비를 할게요.”
  • 유 여사는 웃으며 말을 하자마자 휙 돌아섰다.
  • 거실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고 안영미는 그 자리에 굳어 아무 생각이 안 들었고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때로는 발끝을 쳐다보다가 때로는 유시현을 힐끗 쳐다보기도 했다.
  • 유시현은 회색 스웨트를 입고 있어 차분해 보이면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낮에 입었던 정장 차림보다 훨씬 친근해 보였다.
  • 그가 일부러 옷을 갈아입고 왔을까?
  • 안영미는 또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
  • “영미 씨.”
  • 조용하던 분위기를 깨고 유시현이 입을 열었다.
  • 안영미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 “네, 유 대표님.”
  • 안영미는 말을 한 후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유 씨 그룹의 직원이라는 사실을 유시현에게 말하지 않았다.
  • 이제 신분이 드러났으니 그가 오늘 소개팅이 자신의 자작극이라고 그녀를 오해할 것만 같았다.
  • 순간 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의외로 유시현은 그녀의 말에 신경 쓰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
  • “손 줘보세요.”
  • 그녀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 “왼손.”
  • 유시현이 말했다.
  • 안영미는 오른손을 거둬들이고 얌전하게 왼손을 내밀었다.
  • 이때 유시현은 백금 반지를 꺼내 들어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 그는 자상하고 점잖게 단번에 끼워줬다.
  • 안영미는 놀라 가슴이 두근댔고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 그녀가 유시현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손에도 똑같은 반지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 그의 손가락은 길고 매끈해 반지가 유난히 예뻐 보였다.
  • “사이즈가 딱 맞네요.”
  • 유시현은 자신의 안목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저…”
  • 안영미의 가슴은 또 한 번 두근거렸다.
  • “모든 걸 다 주겠다고 말했잖아요.”
  • 유시현은 안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앞으로 날 시현이라 불러요. 저는 영미라고 부를게요.”
  • 유시현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전…”
  • 안영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잡으려 노력했다.
  •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저와 당신은 이제 딱 한 번 만났고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잖아요?”
  • 안영미는 참다못해 얼굴이 빨개지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 사실 유시현과의 결혼은 그녀는 고민할 것도, 손해 볼 것도 없었고 오히려 유시현쪽에서 큰 손해였다!
  • 유 씨 사모님이 되는 것을 가치로 따지자면 다이아몬드를 열 트럭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 “당신에 대해 알아야 할 건 뭐죠?”
  • 유시현이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 그가 캐묻자 그녀는 입을 오물거리며 몇 가지 예를 들었다.
  • “예를 들면 제 이름이라든지, 직업이라든지, 어느 대학을 졸업했…”
  • “이름은 안영미, 올해 24살이고 강주대 행정 학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유 씨 그룹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전에 사귄 남자친구는 금융학과이며 졸업 후 헤어…”
  • “그만, 그만.”
  • 그녀는 얼른 유시현의 말을 끊었다.
  • 지나간 연애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그녀는 쑥스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 하지만 유시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 주고 있었다.
  • 안영미는 침을 삼켰다. 보아하니 유시현이 그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그가 그녀의 연애 경험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오해를 하진 않을까? 생각 끝에 안영미는 결국 유시현에게 설명을 해주기로 다짐했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대학 때 사귄 남자친구와는 순수하게 연애만 했어요. 손을 딱 두 번밖에 안 잡았어요.”
  • 그러자 안영미는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 유시현은 원래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안영미가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앞에 있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싸늘했던 그의 얼굴도 조금 사그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