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5화 아이 지워

  • “지워.”
  • 구정현이 미련 없이 말했다.
  • 순간 진아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칼에 베인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 “대표님은 아이가 갖고 싶지 않아요?”
  • 진아리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내 아이는 사랑하는 여자와의 아이여야 해. 만약에 실수로 임신했다면 내일 의사를 불러줄게. 병원에 가서 수술해.”
  • 구정현은 담담한 얼굴로 가장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 진아리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4년이나 함께 살았는데 속궁합이 좋은 것 빼고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얘기였다.
  • ‘아이를 지워?’
  • 참 잔인한 남자였다. 자신의 아이까지 버리다니. 이런 남자한테 인생을 걸 필요가 있을까?
  • 진아리는 마음속 잡념들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 “대표님, 어떻게 저한테 이토록 잔인할 수가 있어요?”
  • 구정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결혼할 때 명확히 얘기했잖아. 우린 고용 관계일 뿐이라고. 난 돈으로 당신 몸을 산 거야. 관계가 끝나면 위자료를 지급할 거고. 만약 임신했다면 돈 줄 테니까 병원에 가서 아이 지워. 애초에 이미 얘기가 된 내용이었잖아. 왜? 아이로 날 붙잡고 싶어?”
  • 진아리는 고개를 숙이고 씁쓸한 표정을 감추었다.
  • ‘역시 잔인하구나.’
  • 구정현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턱을 억지로 치켜올렸다. 새빨개진 그녀의 눈동자를 본 그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 “왜 울어?”
  • 진아리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그의 손을 쳐내고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안 울어요.”
  • 구정현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돌리며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 “정말 임신했어?”
  • 진아리는 볼을 잔뜩 부풀리고 구정현을 바라보았다.
  • “아리야, 정말 임신했어?”
  • 구정현이 다시 구슬리듯 물었다.
  • 진아리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대표님, 만약 제가 임신했고 하면 내일 당장 사람을 시켜 저를 병원으로 끌고 갈 거예요?”
  • 구정현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 “아이는 낳을 수 없어. 가희한테 상처 주기 싫으니까.”
  • 진아리는 누군가가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이 남자는 선의의 거짓말도 하기 싫어하는 남자였다. 돈으로 만족시켜 주는 것 외에 감정적으로는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 ‘항상 양가희가 먼저네요. 그 여자한테 그렇게 상처받고도 여전히 그 여자만 생각하네요. 양가희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당신 마음속에는 항상 그녀의 자리를 남겨뒀겠죠.’
  • 진아리는 갑자기 한 번도 보지 못한 양가희한테 강한 질투를 느꼈다.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패배한 느낌이었다.
  • “대표님은 참 일편단심이네요.”
  • 진아리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 “대표님, 그렇게 양가희 씨를 사랑한다면서 잠은 왜 다른 여자랑 자는 거예요?”
  • 진아리가 또 물었다.
  • 남자는 정말 하반신으로 사고하는 동물인 걸까? 예쁜 여자면 다 같이 잘 수 있고 성생활과 마음을 따로 분류할 수 있는 존재일까?
  • “가희는 내가 잘해줄 가치가 있는 좋은 여자야.”
  • 구정현이 말했다.
  • ‘그럼 나는 나쁜 여자인가요?’
  • 진아리는 쓴맛을 속으로 삼키며 생각했다.
  • 그녀는 구정현의 품을 벗어나며 딱딱하게 말했다.
  • “대표님, 오늘 많이 피곤해서 하루만 파업할게요. 욕구는 대표님이 알아서 해결해요. 저는 손님방에 가서 잘게요.”
  • 말을 마친 그녀는 밖으로 향했다.
  • 구정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 “당신 진짜 임신했어?”
  • 진아리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임신했다고 해도 알아서 지울게요. 난 내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아버지를 잃는 건 싫거든요.”
  • 구정현의 표정이 더 차갑게 굳었다. 그는 이렇게 차가운 진아리가 낯설었다.
  • “진아리, 거기 서.”
  • 진아리가 방을 나서는데 구정현이 그녀를 불렀다.
  • “대표님, 또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요?”
  • 진아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