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명세서를 받아들고서 그 위에 적힌 구입 약품을 확인하고 안도한 연혜빈은 이내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송시훈이 그쪽을 보낸 거죠? 날 데려오라고요, 맞죠?”
연혜빈은 송시훈이 로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운전기사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송 대표님은 연혜빈 씨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고 연혜빈 씨를 개에 비유하셨는데 아직도 그분께 희망을 품고 계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운전기사는 정차되어 있는 차량의 뒷좌석 차 문을 열어젖혔다.
“타시죠.”
그 말에 연혜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차량 뒷좌석에는 낯선 남자가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언뜻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서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고압적인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그쪽 대표님과는 처음 보는 사이에요…”
“연혜빈 씨가 궁금해하시는 모든 것들을 저희 대표님께서 전부 알려주실 겁니다.”
의아해하는 연혜빈의 표정에 운전기사는 이내 말을 덧붙였다.
“한 마디 더 말씀드리자면, 저희 대표님께서는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연혜빈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차 안에 앉아있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진실이 너무 궁금했던 연혜빈은 이를 악물고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벌어진 상처에서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다리를 쩔뚝거리는 연혜빈의 모습을 발견한 운전기사는 재빨리 상처 부위를 싸매주고는 차량 트렁크에서 꺼낸 샤워 타월을 연혜빈에게 내밀었다. 운전기사의 손에서 샤워 타월을 받아든 연혜빈은 몸에 걸친 채 차에 올라타고서 남자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내 차에 시동이 걸리며 빠르게 신혁 그룹을 빠져나왔다.
연혜빈은 차 안의 불빛을 빌려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있는 남자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어쩐지 낯익은 옆모습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한참 머뭇거리던 연혜빈은 이내 숨 막힐 듯한 정적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하려던 얘기가 뭐예요?”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싸늘한 눈동자로 연혜빈의 얼굴을 훑었다. 그 시선은 이내 그녀의 목 언저리에 멈추었다.
“목걸이 돌려줘.”
낮고 차가운 목소리에 연혜빈은 반사적으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는 흠칫했다. 돌려달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불어 이 목걸이가 눈앞의 남자가 남겨두고 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도. 연혜빈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몸서리를 쳤다.
“그, 그날 밤 남자가 당신이었어?”
남자의 낯익은 옆모습은 일전에 송시훈이 집어던진 사진에서 보았던 옆모습과 똑같았다!
“문자도 당신이 보낸 거지?”
연혜빈이 날카롭게 추궁하며 남자의 뺨을 후려갈기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짐승만도 못한 자식!”
“난 문자를 보낸 적 없어. 하지만 그 방은 내가 예약한 거 맞아.”
그렇게 말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남자는 연혜빈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날 밤 어쩌다 내 방에 들어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 말에 연혜빈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밤, 2588호 실의 문을 두드리려 한 순간, 분명 누군가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를 룸 안으로 밀어 넣었었다.
“그게 무슨 웃기지도 않은 소리야!”
연혜빈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그 방을 당신이 예약한 거라면 당신 말고 누가 나한테 그런 메시지를 보내?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나한테 그런 짓을 저지른 거야?”
그러자 반우석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생각보다 많이 멍청하네!”
“…”
연혜빈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연혜빈의 목에서 목걸이를 낚아챈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목걸이를 닦으며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
“호텔로 가. 우리 연혜빈 아가씨께서 진실을 알고 싶어 하신다.”
“네,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란휴르 호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문득 그날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연혜빈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다리를 거즈로 감싼 데다 온몸이 흠뻑 젖은 연혜빈은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몰골이었다.
반우석을 따라 호텔 룸에 들어선 연혜빈은 몸에 걸친 샤워 타월을 움켜쥐며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말한 진실이 뭔데?”
그 말에 반우석이 옆에 있던 운전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리모컨을 들고서 벽에 걸린 티브이 전원을 켰다. 곧이어 티브이 화면에 누군가의 방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실시간 모니터링인 것 같았다.
연혜빈은 이내 화면으로 들어오는 낯익은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이제는 전 남편이 되어버린 송시훈과 그녀의 절친인 윤지은이었다!
“훈아, 드디어 소원을 이룬 걸 축하해.”
그렇게 말하며 송시훈을 뒤에서 끌어안은 윤지은의 가냘픈 두 손이 송시훈의 가슴을 끈적하게 쓸어내렸다.
“근데 너 진짜 독하다. 어떻게 연혜빈한테 땡전 한 푼 남겨주지 않을 수 있어? 걔네 할머니 치료비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어차피 곧 죽을 노친네, 알게 뭐야.”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연 송시훈은 몸을 돌려 윤지은의 입술을 진득하게 베어 물었다.
“당신 덕분에 주주들의 약점을 잡았고 그들의 손에서 순조롭게 신혁 그룹의 지분을 가로챘어. 신혁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게 된 건 모두 당신 덕분이야.”
“내가 내 애인을 돕지 않으면 누굴 도와?”
그렇게 말하며 윤지은이 송시훈의 가슴을 가볍게 내리쳤다.
“경찰서 쪽은 이미 얘기를 해두었어. 설령 연혜빈이 살아남는다 해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근데 훈아, 너 생각보다 독한 사람이더라? 양부, 양모한테도 손을 대고?”
두 사람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연혜빈은 윤지은의 마지막 한 마디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어질어질했다.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연혜빈은 단단한 가슴 위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