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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옥살이

  • 인부들이 벌집 쑤시듯 집을 뒤집어놓고 떠나자 화려했던 별장은 최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문짝마저 뜯겨나가 폐허처럼 변해 버렸다.
  • 그 순간, 노파 한 명이 상자를 끌고서 절뚝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상자에는 옷가지들과 비싼 장신구들이 들어 있었다.
  • “아가씨, 그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 아가씨께서 평소 즐겨 하셨던 것들을 전부 치워두었습니다.”
  • 연혜빈의 시선이 절뚝거리는 고용인의 다리에 향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이렇게 연세가 많으신 분한테도 손을 대다니. 연혜빈은 눈시울을 붉혔다.
  • “안 씨 아주머니…”
  • 안 씨 아주머니는 모친이 친정에서 직접 데려온 고용인으로 연혜빈이 어릴 적부터 옆에서 함께했던 분이었다.
  • 혹여 그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까 두려워 안 씨 아주머니는 연혜빈을 자신의 낡은 집으로 안내했다. 거실 하나에 방 두 개로 되어있는 안 씨 아주머니의 집은 제법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안 씨 아주머니는 그중에서 가장 깔끔한 방을 연혜빈에게 내주었다.
  • “제가 사모님을 모시기 시작했을 때 사모님께서 계약금을 대신 내주시고 마련한 집이에요. 그런데 사모님께서 그렇게 되실 줄은…”
  • 그 말에 연혜빈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 집에서 일하는 일개 고용인조차 은혜를 갚을 줄 아는데 윤지은은 적반하장으로 자신한테 그토록 많은 도움을 준 그녀를 몰아붙였다!
  • 부모님의 위패를 적당한 곳에 잘 모셔둔 연혜빈은 이내 보석함에서 모친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남기신 보석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안 씨 아주머니께 드렸다.
  • “안 씨 아주머니, 우리 엄마 아빠 위패를 잠시 보관해 주세요. 제가 해야 할 일을 마치면 바로 찾으러 올게요.”
  • “여사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어요. 제가 여사님을 보살필까요?”
  • “할머니 곁에는 항시 대기하고 계시는 간호사분들이 계세요. 아주머니는 다리도 편치 않으신데 집에서 푹 쉬세요.”
  • 안 씨 아주머니와 작별한 뒤 연혜빈은 이내 차를 몰고서 병원으로 향했다.
  • 운전대를 잡고 있는 와중에도 연혜빈은 간간이 넋을 놓았다.
  • 이제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대체 무엇으로 복수를 하고 무엇으로 신혁을 되찾지.
  • 그 순간,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한 남자의 차갑고 매서운 눈초리에 연혜빈은 황급히 머리를 털어 생각을 떨쳐냈다. 일단은 할머니 상태부터 살피고 앞으로의 계획은 그때 가서 다시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 그렇게 생각하며 운전에 집중하던 찰나, 벤틀리 한 대가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 반쯤 내려간 뒷차창을 통해 차에 탄 사람의 모습이 언뜻 엿보였다.
  • 송시훈!
  • 연혜빈은 반사적으로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으며 앞서가고 있는 벤틀리의 뒤꽁무니를 뒤쫓았다.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동안 송시훈이 보였던 잔혹한 행보들과 부모님의 위패가 바닥에 처박히는 장면들에 연혜빈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냈다.
  • 다시없을 기회였다.
  • 만일 이 자리에서 송시훈을 치어 죽일 수 있다면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자존심을 팔 필요도 없었다.
  • 앞서가던 벤틀리가 반복적으로 차선을 변경하며 주행한 탓에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 벤틀리의 모습이 다시 시야에 나타나자 연혜빈은 음산하게 웃으며 가속페달을 밟고서 힘껏 들이받았다.
  • 그대로 날아간 검은색 벤틀리는 허공에서 몇 바퀴 회전하더니 이내 커다란 굉음과 함께 전복되었다.
  • 충격으로 운전대를 제대로 잡지 못한 연혜빈의 차량도 가드레일을 들이받고서 뒤집혔다. 운전석에 앉았던 연혜빈은 머리가 터진 채 피를 철철 흘렸고 온몸에 깨어진 유리 파편들이 박혀 들었다.
  • 멀지 않은 곳에서 화염에 휩싸인 벤틀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연혜빈의 입가에 한결 개운해진 미소가 떠올랐다.
  • 드디어 부모님의 원수를 갚았다!
  • 연혜빈이 미처 안심하기도 전에 그녀가 있는 운전석으로 다가오는 송시훈의 모습이 보였다. 양복 구김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에 연혜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 “못 볼 사람을 보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네. 너랑 같이 산지 자그마치 20 년이야. 덕분에 네가 어떤 성깔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지. 내 차를 미행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눈치챘고 신호등에 걸린 틈을 타 다른 차량이랑 바꿔탄 거야.”
  • “송시훈…”
  • 연혜빈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운전대 위에 쓰러졌다.
  •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여인의 창백한 얼굴을 하릴없이 바라보던 송시훈은 문득 집요하게 자신에게 달라붙으며 오빠라고 불러대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 한층 누그러진 눈빛으로 막 손을 내밀려던 찰나, 점점 가까워지는 앰뷸런스 소리에 송시훈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내 구급차에서 뛰어내리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보였다.
  • 구급차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출동한 것이지?
  • 가까워지는 의료진들의 모습에 송시훈은 지체 없이 길가에 세워진 벤틀리에 올라타며 냉랭하게 지시했다.
  • “살인 미수죄로 경찰에 신고해서 연혜빈을 감옥에 처넣어!”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아들을 돌보고 있던 윤지은은 연혜빈이 차로 송시훈을 치려다 도리어 병원에 실려갔다는 심복의 연락을 받고서 쾌재를 불렀다.
  • 지난번 연혜빈이 갑작스레 별장에 들이닥쳐 소란을 피워대자 잔뜩 겁을 먹은 아들이 그녀의 품에서 떨어져 하루 종일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날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윤지은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렸다.
  • “연혜빈을 잘 보살필만한 사람 둘을 같이 들여보내!”
  • 이 모든 건 대학 시절 멋모르고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건 연혜빈 탓이다. 그녀에게 여행도 시켜주고 옷도 사주고 가방도 사준 탓에 윤지은은 세상은 평등하지 않은 것이라는 이치를 깨우치게 되었다.
  • 잘못이라면 지극히도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연혜빈의 어리석음이 잘못했다.
  • 사실 윤지은은 연혜빈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그냥 내버려 두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 번 그녀의 아들을 죽일 뻔했던 일이 있은 뒤로 윤지은은 이제 더 이상 연혜빈을 용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