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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시체한테 관심 없어

  •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연혜빈은 잔뜩 긴장된 얼굴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반우석은 없고 그의 운전기사만 보이자 연혜빈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연혜빈 씨.”
  • 성준이 연혜빈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인사를 전했다.
  • “대표님께서 집을 나서기 전에 연혜빈 씨한테 옷 몇 벌을 사드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 순순히 대답한 연혜빈이었지만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 그녀의 몸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녀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그 남자의 저의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성준은 연혜빈을 차에 태우고서 시중심에서 가장 번화한 백화점으로 향했다.
  • 성준은 차를 주차시켜야 했기에 연혜빈한테 먼저 둘러보고 있을 것을 권했다.
  •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로 내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연혜빈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 “이번 시즌에 나온 신상들입니다. 편하게 둘러보세요.”
  • 그 순간, 귓가를 불쑥 파고드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연혜빈은 그제야 자신이 어느새 명품 매장 진열대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 쇼핑하러 왔다는 사실을 빠르게 상기한 연혜빈은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새하얀 실크 원피스를 내리기 위해 진열대로 손을 내밀던 찰나였다. 그녀의 반대편에서 돌연 나타난 새하얀 손이 재빨리 그녀가 보려고 했던 원피스를 가로채갔다.
  • 여자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로챘다는 자각도 없는 것인지 오히려 귀한 물건을 진상하듯 옆 사람에게 내밀었다.
  • “지은 언니, 이 원피스도 한 번 입어보세요. 언니랑 엄청 잘 어울려요!”
  • 귓가를 파고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연혜빈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옷을 고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 화려하게 치장한 두 여인을 양옆에 대동한 윤지은은 D 브랜드의 신상 롱드레스에 블루 컬러의 에르메스 백을 들고 있었는데 귀티가 넘쳐흘렀다.
  • “그러네, 괜찮아 보이네…”
  • 친구가 골라준 옷을 한참 감상하던 윤지은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어딘가 제정신이 아닌 듯 넋이 나간 연혜빈의 모습이 보였다.
  • 연혜빈이 보석으로 풀려난 뒤 윤지은은 암암리에 보석금을 지불한 남자의 정체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그러다 그 남자가 누군가의 운전기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일개 운전기사 주제에 제법 능력이 있네. 이런 명품숍에서 쇼핑할 돈도 있고 말이야…
  • 연혜빈이 돈 때문에 자존심을 팔았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통쾌해진 윤지은은 환히 웃으며 연혜빈에게 다가갔다.
  • “혜빈아, 여긴 어쩐 일이야? 너도 쇼핑하러 왔어?”
  • 연혜빈은 주먹을 움켜쥔 채 윤지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윤지은을 죽일 생각들로 가득 차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 하지만 가진 것도 없고 어젯밤 남자에게 무참히 거절을 당한 뒤라 윤지은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없었다.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연혜빈의 눈동자가 어둡게 침전했다. 연혜빈이 매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궁상맞은 연혜빈의 모습에 깨고소했던 윤지은이 연혜빈을 쉽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 “상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힘들다는 거 알아. 자, 여기 1억 들어있어. 그동안 함께 지낸 정을 생각해서 주는 거야.”
  • 그렇게 말하며 윤지은은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연혜빈에게 내밀었다.
  • “너나 실컷 써!”
  • 연혜빈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윤지은의 손을 뿌리쳤다.
  • “연혜빈.”
  • 그 모습에 윤지은의 친구들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어댔다.
  • “우리 지은 언니는 혹여 네가 굶게 될까 걱정되어서 주는 건데 네가 뭔데 우리 언니한테 눈치를 주는 거야?”
  • “네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랑 호텔에서 뒹굴었다는 사실을 서울 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데 회사에서 널 고용할 것 같아?”
  • “에이, 회사에 출근할 필요 있어? 얼굴이 이렇게 예쁜데 아무 업소나 찾아 다리를 벌리고 있으면 떼돈 벌 수 있을 텐데.”
  • “꺄하하, 계집애, 나빴어.”
  • 친구들의 끊임없는 비아냥거림에도 윤지은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잠자코 구경만 했다.
  • 과거의 그녀는 마치 연혜빈의 곁에 서있는 들러리처럼 추종자들에 둘러싸인 연혜빈의 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기만 하며 연혜빈의 가문과 연혜빈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부러워했다…
  •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신분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 윤지은은 연혜빈의 손에 억지로 카드를 쥐여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받아. 저승에 계신 부모님들과 할머니를 생각해야지. 그분들도 지금 네 꼴을 보시게 되면…”
  • 연혜빈은 여태 주변에서 아무리 무어라 지껄여도 꾹 참고 있었다.
  • 그런데 감히 그녀의 가족을 모욕해? 참다못한 연혜빈은 윤지은의 멱살을 움켜잡은 채 윤지은의 양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 쉴 새 없이 내리꽂히는 손바닥에 윤지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혜빈을 떼어내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오히려 연혜빈에게 손을 잡힌 모양새가 되어 더욱 거센 따귀 세레가 잇달아 퍼부어졌다.
  • “미쳤어?”
  • 곁에 있던 윤지은의 친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연혜빈을 떼어내려 했지만 연혜빈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지레 겁을 먹고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도 난 연 씨 가문의 사람이야!”
  • 연혜빈은 잇새로 짓씹듯 말을 내뱉으며 윤지은의 뺨을 내리쳤다.
  •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언젠가 반드시 연 씨 가문을 되찾을 거야 넌…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아도 네 몸과 함께 시골에서 딸려온 그 악취를 절대 막을 수 없어!”
  • 제법 소란스러운 인기척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혜빈에게 뺨을 얻어맞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도저히 연혜빈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벌겋게 부어오른 뺨에 서서히 감각을 잃어가는 듯했다.
  • 그로부터 족히 3 분 동안 윤지은의 뺨을 후려갈긴 뒤에야 멈춘 연혜빈은 서슬 퍼런 시선으로 윤지은을 노려보았다.
  • “지금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너야. 우리 할머니 목숨, 조만간 꼭 되찾을 테니까 각오해 둬!”
  • 연혜빈의 눈동자에 깃든 깊고 어두운 원한에 윤지은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은 듯한 얼굴로 흠칫 몸을 떨었다.
  • 절대 그럴 리 없었다!
  • 연혜빈은 가문도 가족도 전부 잃었는데 대체 무슨 수로?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윤지은은 더 이상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얻어맞은 만큼 대갚음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찰나, 불현듯 튀어나온 큼직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서 힘껏 뿌리쳤다.
  • “꺄악!”
  •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윤지은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