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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함정

  • 연혜빈은 그제야 어젯밤 침대에서 긴장하고 있는 그녀의 귓전을 때리던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 “힘 빼.”
  • 차가운 편인 송시훈의 목소리와 달리 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낮고 굵었다.
  • “어, 어떻게…”
  • 침대 위에 흩뿌려진 사진들을 훑어보던 연혜빈의 안색이 카메라 플래시보다 더욱 창백해졌다.
  • 그럼 어제 그녀와 밤을 보낸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 “연혜빈 씨, 송시훈 씨와는 소꿉친구였다고 들었는데 소꿉친구 남편을 배신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 “한순간의 새로움 때문인가요?”
  • 기자들은 망연자실한 연혜빈의 안색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헤드라인을 장식할 단독 기사를 확보하기 위해 하나같이 질문 세례를 퍼부어댔다. 끊임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들이 연혜빈의 몸 구석구석, 표정 하나하나에 닿았다.
  • “나가요! 다들 나가라고요!”
  • 연혜빈이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기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팔을 휘둘렀지만 기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오히려 더욱 거북한 질문을 퍼부어대기 일쑤였다.
  • “연혜빈 씨, 몸에 키스마크가 엄청 많네요. 그 남자랑 대체 얼마나 한 겁니까?”
  • 기자들의 거리낌 없고 밑도 끝도 없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연혜빈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 한편, 호텔 건너편에 정차되어 있는 검은색 마이바흐의 뒷차창이 천천히 내려지더니 남자의 서늘하고 냉담한 옆모습이 드러났다. 한 무리의 기자들에 둘러싸인 채 호텔을 빠져나오고 있는 송시훈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가가 한껏 매서워졌다.
  • “훈아… 살살…”
  • 여자의 달큼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해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비볐다. 마치 그 위에 잔존한 여자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려는 듯.
  • 송시훈이라, 기억이 맞는다면 연 씨 가문의 양자에 신혁 그룹의 CEO였었지…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 “송시훈에 대해 알아봐.”
  • “네, 알겠습니다.”
  • 호텔에서의 소동이 있고 1 시간도 안 되어 ‘연 씨 가문의 아가씨, 남편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다’, ‘연혜빈,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다’ 등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단 기사들이 각종 포털 사이트를 연이어 장식했다.
  • 기사들에는 간통 현장에 들이닥친 송시훈의 모습과 벌거벗은 연혜빈의 모습을 찍은 영상들도 함께 첨부되어 있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 연 씨 가문 산하의 신혁 그룹은 연혜빈의 지저분한 사생활 때문에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레드라인 밖으로 밀려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 같은 시각, 고용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집에 돌아온 연혜빈은 송시훈에게 연락하기 위해 고용인의 휴대전화를 빌렸다.
  • 어느새 신상 정보마저 털린 것인지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오는 악의적인 장난전화와 문자 세례들에 그녀의 휴대전화는 꺼둔지 오래였다.
  • 하지만 긴 통화연결음만 이어질 뿐 송시훈은 한 통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 절망한 연혜빈은 찬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필사적으로 몸을 씻었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빡빡 문질러도 어젯밤 그 남자가 남긴 체취는 여전히 남아있는 듯했다.
  • 호텔을 나설 때 그녀를 바라보던 송시훈의 싸늘한 눈빛을 떠올린 연혜빈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졌다.
  •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불현듯 울려 퍼지는 벨 소리에 연혜빈은 황급히 선반 위에 놓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 “여보…”
  • “구청에서 만나!”
  • 송시훈은 그 말만 남기고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 연혜빈은 그제야 자신이 밤새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 때문인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 비틀거리며 욕조에서 빠져나온 연혜빈은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골라 입고서 구청으로 향하는 길에 파운데이션으로 초췌하고 창백한 안색을 가렸다.
  • 송시훈을 만나면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눠볼 요량이었다. 이대로 이혼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잘 설명하기만 한다면 송시훈도 충분히 이해하고 그녀를 용서할 것이다!
  • 구청에 도착한 연혜빈은 입구에서 검은 양복 차림의 송시훈을 발견했다. 주변에 기자들이 없는걸 보니 미리 손을 써둔 모양이었다.
  • 냉혹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연혜빈은 여전히 그녀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는 듯한 송시훈의 모습에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 “여보, 내 얘기 좀 들어줘…”
  • 한달음에 송시훈에게로 뛰어간 연혜빈은 송시훈의 손을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 “어젯밤에 여보가 다른 여자랑 란휴르 호텔에 있다는 문자를 받았어. 그리고 여보 휴대폰 위치도 란휴르 호텔로 되어있어서 확인하기 위해 간 거야…”
  • 그 말에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든 송시훈은 어젯밤 스케줄 표를 보여주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 “난 어젯밤 거래처 사람을 호텔에 바래다주고 10 분도 안 되어 나왔어!”
  • 스케줄 표를 확인한 연혜빈은 쓰러질 듯 몸을 비틀거렸다.
  • 설마 누군가 일부러 그녀를 함정에 빠드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