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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제 파트너한테 무슨 짓입니까

  • 악의에 찬 주변의 숙덕거림에도 연혜빈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입술을 오므린 채 테이블에서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들었다.
  • 호텔에서의 그 사건은 송시훈이 꾸민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사와 더불에 인터넷에 그토록 빠른 시간 내에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송시훈이 미리 손을 써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 지금쯤이면 아마 서울 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명예로운’ 사적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 맨입으로 제아무리 변명한다고 한들 믿을 작자들도 아니었기에 차라리 못 들은 척하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 연혜빈은 샴페인을 홀짝이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오늘 그녀가 참석한 연회가 생각보다 규모가 큰 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울 시 재계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은 전부 참석한 것 같았다.
  • 연혜빈은 그 남자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쓰음이 있으면 그만큼 협상할 여지도 생기는 법이니까.
  • 다만 그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여태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연혜빈은 최대한 존재감을 줄이기 위해 구석진 자리에 잠자코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를 몸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어보며 다가오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스폰이 필요하지 않냐는 얘기를 전하는 남자들도 간간이 존재했다.
  • 덕분에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여인들의 시선이 더욱 뾰족해졌다.
  • 보다 못한 귀부인 한 명이 돌연 와인잔을 들어 연혜빈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 “역겨운 년, 꺼져!”
  • 눈동자로 파고드는 차가운 와인에 연혜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어릴 적부터 연 씨 가문의 아가씨로 곱게 자란 연혜빈은 늘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었다. 연회에 참석해서,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와인을 뒤집어쓴 건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 집안도 가족도 없고, 더 이상 한 가문의 아가씨가 아닌 지금의 초라한 신분으로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아껴주고 감싸주는 사람도 없었다…
  • 무감한 눈동자로 귀부인을 응시하던 연혜빈은 추궁하고 따지는 대신, 테이블 위의 냅킨을 챙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곁에 윤지은을 대동하고서 나타난 송시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 검은 양복 차림의 송시훈은 꼿꼿한 자태에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제법 점잖은 모습이었다.
  • “서 여사님.”
  • 송시훈을 따라 각종 연회에 자주 드나들었던 윤지은은 곧장 사람들 틈에서 서 여사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 “오늘 착용하신 진주 귀걸이 여사님과 정말 잘 어울리세요.”
  • 딱딱하게 굳은 서 여사의 안색을 기민하게 살피던 윤지은은 이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서 여사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 “재수 없는 사람을 마주쳤어요!”
  • 그렇게 말하며 서 여사는 자신이 들이부은 와인을 뒤집어쓴 연혜빈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 “가문에 먹칠을 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연회장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몰라!”
  • 서 여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윤지은은 머리가 흠뻑 젖은 연혜빈을 발견했다.
  • 몇 시간 전 백화점에서 뺨을 내리치던 연혜빈의 모습을 떠올린 윤지은은 아직도 따끔거리는 뺨을 쓰다듬으며 연혜빈을 노려보았다.
  • 그러다 문득 연혜빈이 몸에 걸치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드레스를 발견하고는 눈을 음산하게 빛내며 연혜빈의 앞으로 다가가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내 눈이 정확하다면 이 드레스, HMS 브랜드의 패션쇼 제품이지? 웬만한 연예인들도 손에 넣을 수 없다던데 네가 무슨 수로 구한 거야?”
  • 그렇게 말하며 잠시 뜸을 들인 윤지은은 일부로 목청을 돋우어 말을 덧붙였다.
  • “네 남자 친구가 아무리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는 운전기사라고 해도 이런 드레스를 사줄 형편은 안 되는 거 아냐? 요즘 운전기사 연봉이 그렇게 높아?”
  • 그 말에 연혜빈을 힐끔거리던 여인들의 눈동자에 깃들었던 멸시와 조롱 섞인 감정들이 더욱 짙어졌다.
  • 서 여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 “십중팔구 다른 남자를 꼬드겨서 얻은 게 분명해요! 오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적잖은 공을 들인 것 같네요.”
  • “연 씨 가문 아가씨라더니, 연 대표님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 “송 대표님이 불쌍해요. 조강지처인 줄로 알고 계셨을 텐데. 그 아내가 이런 사람일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 주변의 빈정거림에도 연혜빈은 짐짓 태연한 얼굴로 얼굴과 드레스에 묻은 와인을 휴지로 닦아냈다.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내디디려던 찰나, 큼직한 체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 담담하게 물어오는 송시훈의 목소리에 연혜빈은 냉랭하게 되받아쳤다.
  • 송시훈은 초라하고 궁상맞은 연혜빈의 모습을 차분히 눈에 담았다. 반쯤 젖은 머리카락이 뽀얀 어깨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 예의 공격적이고 눈부신 아름다움 대신 어딘가 가녀리고 안쓰러웠다.
  • 그 모습에 송시훈은 마음이 통쾌해진 동시에 어쩐지 묘한 감정이 깃들었다.
  • 송시훈이 손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힘껏 움켜쥐자 연혜빈은 매서운 눈초리로 송시훈을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 “송시훈, 지금 여기는 연회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 우린 이제 아무 사이가 아니니까 나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 “난 그냥 오늘 연회에 들어와서는 안 될 사람이 섞이는 걸 원치 않을 뿐이야.”
  • 그렇게 말하며 송시훈이 연혜빈을 내쫓기 위해 종업원을 부르려던 찰나, 잠자코 있던 윤지은이 불쑥 목소리를 냈다.
  • “훈아…”
  • 울상을 짓는 윤지은의 표정에 단번에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송시훈은 또다시 연혜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 “지은이가 아침에 백화점에서 너랑 마주쳤다고 들었어. 뺨을 때렸다며? 지은이 뺨을 때린 만큼 사과하든지 때린 만큼 지은이한테 뺨을 맞든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해.”
  • 주변에 몰린 사람들의 시선들에 연혜빈은 몸을 휘청거렸다. 샹들리에의 환한 불빛이 연혜빈의 창백한 얼굴 위에 새하얗게 부서졌다.
  • 1 년 전, 바로 이곳에서 송시훈과 버진 로드를 걸었다.
  • 그 송시훈이, 그녀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 남자가 그로부터 정확히 1 년 뒤에 같은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내연녀와 손을 잡고서 그녀에게 모욕을 줄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 “윤지은이 먼저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을 모욕했어. 난 절대 사과하지 않아.”
  • 그렇게 말하며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혀끝을 깨물던 연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걸레랑 개새끼는 영원하다더니 너희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 연혜빈이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송시훈이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연혜빈의 뺨을 내리쳤다.
  •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뺨을 맞은 연혜빈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강인한 팔뚝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몸을 안정적으로 지탱했다.
  • 곧이어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 “송 대표님, 지금 제 파트너한테 무슨 짓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