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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금수만도 못한 자식

  • 승용차가 연혜빈과 부딪치려는 찰나,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튀어나오더니 연혜빈을 힘껏 끌어당겼다.
  •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스치고 지나간 승용차는 이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 “연혜빈 씨, 고작 그따위 남자 때문에 잘못된 마음을 품지 마세요.”
  • 연혜빈을 구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반우석의 운전기사, 성준이었다.
  • “연혜빈 씨가 삶을 포기하신다면 홀로 남아있을 할머님은 어떡합니까?”
  • 그 말에 연혜빈은 퍼뜩 정신을 가다듬었다. 서성준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할머니는 어떡하지.
  • 연혜빈이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차량 한 대가 가까이 다가왔다. 성준은 이내 차 문을 열어주며 그녀를 부드럽게 안으로 밀었다.
  • “대표님께서 연혜빈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연혜빈 씨가 필요로 하는 건 저희 대표님께서 전부 드릴 수 있습니다.”
  •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준다면 난 그 사람에게 뭘 내줘야 되죠?”
  • 그렇게 말하며 연혜빈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그녀의 순결을 가져갔다고 해서 그 남자가 무조건적으로 그녀를 도울 것이라 생각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 지금의 그녀는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진 거로도 모자라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 연혜빈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 안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한테도 감사했다고 전해주세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 마지막 자존심마저 잃고 싶지는 않아요.”
  • 단호한 연혜빈의 모습에 성준은 별다른 말없이 명함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 “제 연락처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 “감사합니다.”
  • 건성으로 명함을 받아든 연혜빈은 이내 발길을 돌렸다.
  • 에반으로 돌아온 성준은 반우석에게 연혜빈이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 “대표님, 그 승용차는 처음부터 연혜빈을 노렸습니다.”
  • 그 말에 반우석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 “배후를 알아내. 그리고 연혜빈에게 들키지 않게 사람 붙여.”
  • 자존심이 꺾일 때도 되었지.
  • 한편, 윤지은의 집에서 나온 연혜빈은 병원으로 향했다.
  • 지난번 심정지 소동 이후로 할버니는 며칠 동안 병상에 누어 있었지만 다행히 얼마 전에 산소호흡기를 벗으셨다.
  • 아직 침대에서 내려올 수는 없었지만 그전보다 정신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 “할머니.”
  • 연혜빈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장착한 채 병실에 들어섰다.
  • “몸은 좀 어떠세요?”
  • “많이 좋아졌어.”
  • 벌겋게 부은 연혜빈의 눈시울을 발견한 할머니는 곧장 미간을 좁혔다.
  • “왜, 송시훈 그 자식이 속 썩이던?”
  • 그 말에 연혜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병상에 다가가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할머니가 걱정되어서 그랬어요. 할머니, 꼭 나으셔야 돼요.”
  • 연혜빈이 나무랄 데 없는 연기를 펼친 덕분인지 할머니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 “빈아, 언제 기회를 봐서 송시훈 그 자식과 이혼해. 그 자식은 네 손에서 회사를 빼앗고 널 내칠 놈이야!”
  • “네, 알겠어요…”
  • 할머니는 그녀가 진작에 송시훈에게 전부를 잃었다는 사실과 부모님이 돌아가신 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로부터 며칠 동안 연혜빈은 한시도 할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기회를 틈타 병실 안에 설치되어 있는 티브이를 망가뜨려 할머니께서 뉴스를 접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의료진들에게도 절대 신문을 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연혜빈도 점차 미소를 되찾았다. 그제야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평소와 다름없이 할머니의 병상을 지키던 연혜빈에게 고용인의 전화가 걸려왔다.
  • “아가씨, 갑자기 집에 인부들이 들이닥치더니 사방으로 물건을 나르고 있습니다…”
  • 고용인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 연혜빈은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서 남산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인부들이 값비싼 골동품과 서화를 밖으로 나르고 있었다.
  • 2 층을 뒤지던 사람들은 편의를 위해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전부 1 층 거실에 집어던졌다.
  • 곧이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두 개의 위패를 발견한 연혜빈이 기민하게 달려들었지만 한발 늦었다. 부모님의 위패는 바닥에 부딪친 충격으로 균열이 생겼다.
  • 위패를 품에 안은 채 눈시울을 붉힌 연혜빈은 고개를 들고서 독기 어린 시선으로 인부들을 노려보았다.
  • “감히 위패에 손을 대. 천벌을 받을까 두렵지도 않아?”
  • “고객님께서 쓸데없는 물건들을 저희 마음대로 처리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 연혜빈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지레 겁을 먹은 인부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 “엄마, 아빠, 미안해…”
  • 위패에 묻은 흙을 털어내던 연혜빈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 금수만도 못한 자식! 우리 부모님을 죽인 거로도 모자라 이제 그분들의 위패마저 가만두지 않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