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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자존심

  • “전화, 해…”
  • 윤지은에게 번호를 불러주던 연혜빈은 여인의 목덜미를 잡은 손의 손톱을 세웠다.
  • 다리 힘이 스르르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은 여인은 겁에 질린 눈으로 윤지은을 바라보았다.
  • “진, 진정해…”
  • 예상치 못한 연혜빈의 행동에 윤지은은 화들짝 놀라 어쩔 바를 몰랐다.
  • “집도 가족도 없는 주제에 누구한테 도움을 청하려고?”
  • 연혜빈과 친구로 있는 지난 몇 년 동안 연혜빈의 주변 친구들에 대해서 진작에 파악을 마쳤다. 또한 집안이 좋은 몇몇은 전부 그녀의 편에 포섭했었다.
  • 이 시국에 연혜빈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었다!
  • “전화… 하라고!”
  • 잇새로 짓씹듯 말을 내뱉은 연혜빈은 여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손에 힘을 가했다. 피부를 꿰뚫는 듯한 손톱의 날카로운 감촉에 여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 그 모습에 윤지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인이 실수로라도 그녀의 이름을 내뱉을 것 같아 윤지은은 내키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서 연혜빈이 얘기한 번호를 눌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연결된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 귀에 익은 목소리에 문득 코끝이 시큰해진 연혜빈은 피에 섞인 침을 꿀꺽 삼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연혜빈… 이에요 운, 성… 경찰서로… 와주세요…”
  • 병원에 갈 수만 있다면, 할머니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설령 그 남자가 그녀의 목숨을 원한다 해도 기꺼이 내어줄 생각이었다.
  • 자존심 따위, 하나뿐인 혈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곧이어 소동을 들은 경찰관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 하지만 여인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연혜빈의 서슬 퍼런 기세에 경찰관들도 섣불리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 시간이 흘러도 연혜빈이 연락한 남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흥, 그러면 그렇지. 연혜빈이 허풍을 떨고 있음을 확신한 윤지은이 그냥 연혜빈을 제압하라고 경찰관들을 설득하려던 찰나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황급히 유치장으로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 남자를 발견한 연혜빈의 눈에 희망이 깃들었다.
  • “보석해 주세요… 제발, 병원에 가야 해요…”
  • 남자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 그로부터 1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곁에는 경찰서장도 함께 있었다!
  • 남자가 연혜빈을 부축하고 경찰서를 나가는 순간까지도 서장은 공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 “저희가 병원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 “괜찮습니다.”
  • 남자가 연혜빈을 부축한 채 경찰서를 나서는 뒷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보던 윤지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장에게 물었다.
  • “서장님, 연혜빈은 살인 혐의가 있는 범죄자예요. 이렇게 풀어도 괜찮은 거예요?”
  • “확실한 증거가 없이 함부로 가둘 수는 없습니다.”
  • 서장이 성가시다는 듯한 얼굴로 건성건성 대꾸했다.
  • “더 이상 볼 일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세요!”
  • 손바닥 뒤집듯 돌변한 서장의 태도에 윤지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순순히 경찰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서울 시 경찰서 부서장과 송시훈은 제법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 관계를 이용한 덕분에 윤지은은 연혜빈의 유치장에 순조롭게 사람을 심어둘 수 있었다.
  • 하지만 하나 간과한 점이라면 연혜빈에게 보석금을 내줄만한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 성준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 도착한 연혜빈은 비틀거리며 할머니의 병실로 향했다. 그러다 마침 할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내 할머니를 돌보았던 간호사와 마주쳤다.
  • 간호사의 얼굴에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연혜빈 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 간호사의 등 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천에 덮인 실루엣을 발견한 순간, 연혜빈은 온몸이 피가 얼어붙은 것처럼 숨을 내쉴 수도 들이마실 수도 없었다.
  • “할, 할머니?”
  • 연혜빈은 뻣뻣하게 경직된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한 걸음 한 걸음 병상으로 다가갔다. 들어 올린 손이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 “제가 너무 늦었죠? 미안해요… 빈이에요, 할머니…”
  •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며 할머니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 연혜빈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흰 천을 들추어 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할머니의 얼굴에 연혜빈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 “할머니…”
  • 할머니 덕분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는데 이제 그 유일한 혈육마저 사라졌다.
  •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 만일 그날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성준을 따라 그 별장에 갔더라면, 송시훈의 계략에 걸려 감옥으로 보내지지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할머니를 잃게 되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연혜빈은 할머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서 날이 저물 때까지 울음을 터뜨렸다.
  •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날은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하늘마저 우중충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 하관하는 장례 직원들의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보던 연혜빈은 모두가 떠나간 뒤에도 할머니의 묘비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하염없이 퍼부어대는 빗방울이 연혜빈의 몸을 흠뻑 적셨다.
  •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남은 가족이 없었다.
  •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성준을 따라 에반으로 돌아온 연혜빈은 3 일 내내 고용인들이 입구에 가져다 놓은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 저러다 탈이라도 생길까 염려되어 성준은 반우석에게 연락했다.
  • 성준의 연락을 받은 반우석은 그날 밤 바로 에반으로 돌아왔다.
  • 반우석은 곧바로 여분의 열쇠로 연혜빈의 방 문을 열었다. 빛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따금씩 앓는 듯한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 “엄마, 나 무서워… 나도 데려가…”
  • 더듬거리며 스탠드를 켠 반우석은 이내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 며칠 새 많이 야윈 여인은 뼈만 남은 모습이었다. 시트를 움켜쥔 손가락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손등에는 시퍼런 혈관들이 돌출되어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 이대로 계속 음식 섭취를 거부한다면 내일 즈음이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