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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당신 여자친구 좋은 사람 아니에요

  • “주차하느라 늦었습니다.”
  •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훑어보던 성준이 이내 말을 덧붙였다.
  • “이 가게에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다른 가게로 가보시죠.”
  • 애써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치켜들어 올린 윤지은은 성준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 “그 여자한테 속지 마세요. 당신 여자친구 좋은 사람 아니에요. 사생활이 엄청 난잡하고 지저분한 여자라고요!”
  •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윤지은에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성준은 오로지 연혜빈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 “가시죠, 연혜빈 씨.”
  • 당당한 기세로 허리에 힘을 준 채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윤지은은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 하지만 부국장이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는 소식과 함께 감시 카메라에 찍히지 않는 구역이라 확실한 증거도 없어 경찰서에서도 연혜빈의 죄를 물을 방도가 없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 연혜빈이 으스대는 꼴을 이대로 보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터져 윤지은은 같이 온 친구도 내팽개치고서 신혁 그룹으로 향했다.
  •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송시훈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어쩐 일이야?”
  • “훈아.”
  •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대로 송시훈의 다리에 앉은 윤지은은 울상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 “방금 백화점에서 쇼핑하다가 연혜빈을 만나서 몇 마디 나누었는데…”
  • 그렇게 말하며 윤지은은 마스크를 벗었다. 얼음찜질을 했음에도 한쪽 뺨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 궁상맞은 윤지은의 모습에 송시훈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 “연혜빈이 때린 거야?”
  • 윤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소연했다.
  • “그날 어떤 사람이 경찰서에서 보석금을 내고 연혜빈을 데려갔다고 했잖아. 30 대 중반에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아무리 기댈 곳이 없다고 해도 그 정도로 타락하면 자기도 마음이 편치 않잖아. 그래서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연혜빈에게 돈을 주며 저승에 계시는 부모님들이 슬퍼하신다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어. 그런데 연혜빈이 글쎄 돈을 받기는커녕 내 뺨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어…”
  • 일의 자초지종을 잠자코 듣고 있던 송시훈의 눈가가 매서워졌다.
  • 사실 윤지은이 일부러 연 여사님을 찾아가 화병으로 죽게 만들고 유치장에 사람을 들여보내 연혜빈을 괴롭혔던 사실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알고도 묵인했다는 뜻이었다.
  • 연 씨 가문에서 그에게 진 빚은 그들 가족의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었기에 송시훈도 연혜빈을 편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 하지만 지금의 연혜빈이 유치장에서 나가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늙어빠진 남자에게 빌붙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괜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송시훈이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아귀에 점점 힘이 가해지고 있음을 느낀 윤지은은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 “훈아, 아파.”
  • “얼음찜질로 부기를 가라앉혀.”
  • 그렇게 말하며 손을 거두어들인 송시훈은 냉담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 “오늘 저녁 8 시에 꼭 참석해야 할 자리가 있어. 재계 유명 인사들만 모이는 자리이니까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
  • “…응.”
  • 송시훈의 저조한 기분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챈 윤지은은 약삭빠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 저녁 7 시 반, YX 호텔 입구 앞에 마이바흐 한 대가 멈춰 섰다.
  • YX 호텔은 서울 시 유일무이한 6성급 호텔로 주로 외빈을 접대하고 각종 연회, 리셉션 그리고 피로연을 취급했다.
  • 호텔에 도착하기도 전에 연혜빈은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가 송시훈과 결혼식을 올렸던 호텔임을 한눈에 알아챘다.
  • 머릿속을 헤집는 지난 기억들에 연혜빈은 감정이 복받쳐 올라와 숨을 내쉴 수 없었다.
  • 입술을 깨문 채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추스르던 연혜빈이 불쑥 입을 열었다.
  • “반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연회가 여기서 열리나요?”
  • 백화점에서 옷을 고르고 있을 때, 갑자기 반우석의 연락을 받은 성준은 연혜빈에게 반우석이 저녁에 있을 연회에 동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 연혜빈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제안에 응했고 이내 성준의 손에 이끌려 드레스를 고르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서 YX 호텔로 끌려온 참이었다.
  • “네, 3 번 연회장입니다.”
  • 그렇게 말하며 성준은 연혜빈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 “대표님께서는 업무 때문에 조금 늦으실 듯합니다. 지금 바로 대표님을 모시러 갈 테니까 연혜빈 씨께서 먼저 들어가 계세요.”
  • 3 번 연회장이라니… 참 기막힌 우연이었다.
  • 쓰게 웃으며 초대장을 건네받은 연혜빈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 그러고는 이내 차에서 내려 호텔로 향했다.
  • 연회장 입구에 다다른 연혜빈의 눈앞에 결혼식 날의 모든 장면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 많은 이들의 환호 속에서 송시훈과 입을 맞추고 달콤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었는데…
  •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휘청거리는 연혜빈의 모습에 지나가던 종업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 “괜찮으세요, 손님?”
  • “네, 괜찮아요.”
  • 연혜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 돌아가신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송시훈의 차가운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질끈 깨문 연혜빈은 이내 성큼성큼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송시훈과 결혼할 당시 설레고 행복한 마음만큼 송시훈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 연회장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 그동안 많이 야윈 상태였지만 명문가 출신에 워낙 본바탕이 좋은 터라 검은색 튜브톱 트임 롱드레스를 입은 연혜빈은 단연 연회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다.
  • 샹들리에의 휘황찬란한 빛이 연혜빈의 가녀린 어깨에 아름답게 부서져 내렸고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드리울 때마다 어딘가 가냘프고 아련한 분위기를 머금었다.
  •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연혜빈의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연혜빈이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남자들의 시선이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 “x 나 예뻐…”
  • “예쁘면 뭐해!”
  • 남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그 옆에 서있던 여인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비아냥거렸다.
  • “결혼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밖에서 다른 남자랑 놀아난 여자야!”
  • “그러니까 말이야. 연 씨 가문에서 어떻게 저런 딸이 나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