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한테 속지 마세요. 당신 여자친구 좋은 사람 아니에요. 사생활이 엄청 난잡하고 지저분한 여자라고요!”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윤지은에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성준은 오로지 연혜빈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가시죠, 연혜빈 씨.”
당당한 기세로 허리에 힘을 준 채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윤지은은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부국장이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는 소식과 함께 감시 카메라에 찍히지 않는 구역이라 확실한 증거도 없어 경찰서에서도 연혜빈의 죄를 물을 방도가 없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연혜빈이 으스대는 꼴을 이대로 보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터져 윤지은은 같이 온 친구도 내팽개치고서 신혁 그룹으로 향했다.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송시훈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쩐 일이야?”
“훈아.”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대로 송시훈의 다리에 앉은 윤지은은 울상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방금 백화점에서 쇼핑하다가 연혜빈을 만나서 몇 마디 나누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윤지은은 마스크를 벗었다. 얼음찜질을 했음에도 한쪽 뺨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궁상맞은 윤지은의 모습에 송시훈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연혜빈이 때린 거야?”
윤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소연했다.
“그날 어떤 사람이 경찰서에서 보석금을 내고 연혜빈을 데려갔다고 했잖아. 30 대 중반에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아무리 기댈 곳이 없다고 해도 그 정도로 타락하면 자기도 마음이 편치 않잖아. 그래서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연혜빈에게 돈을 주며 저승에 계시는 부모님들이 슬퍼하신다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어. 그런데 연혜빈이 글쎄 돈을 받기는커녕 내 뺨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어…”
일의 자초지종을 잠자코 듣고 있던 송시훈의 눈가가 매서워졌다.
사실 윤지은이 일부러 연 여사님을 찾아가 화병으로 죽게 만들고 유치장에 사람을 들여보내 연혜빈을 괴롭혔던 사실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알고도 묵인했다는 뜻이었다.
연 씨 가문에서 그에게 진 빚은 그들 가족의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었기에 송시훈도 연혜빈을 편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연혜빈이 유치장에서 나가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늙어빠진 남자에게 빌붙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괜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송시훈이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아귀에 점점 힘이 가해지고 있음을 느낀 윤지은은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훈아, 아파.”
“얼음찜질로 부기를 가라앉혀.”
그렇게 말하며 손을 거두어들인 송시훈은 냉담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오늘 저녁 8 시에 꼭 참석해야 할 자리가 있어. 재계 유명 인사들만 모이는 자리이니까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
“…응.”
송시훈의 저조한 기분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챈 윤지은은 약삭빠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저녁 7 시 반, YX 호텔 입구 앞에 마이바흐 한 대가 멈춰 섰다.
YX 호텔은 서울 시 유일무이한 6성급 호텔로 주로 외빈을 접대하고 각종 연회, 리셉션 그리고 피로연을 취급했다.
호텔에 도착하기도 전에 연혜빈은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가 송시훈과 결혼식을 올렸던 호텔임을 한눈에 알아챘다.
머릿속을 헤집는 지난 기억들에 연혜빈은 감정이 복받쳐 올라와 숨을 내쉴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문 채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추스르던 연혜빈이 불쑥 입을 열었다.
“반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연회가 여기서 열리나요?”
백화점에서 옷을 고르고 있을 때, 갑자기 반우석의 연락을 받은 성준은 연혜빈에게 반우석이 저녁에 있을 연회에 동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연혜빈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제안에 응했고 이내 성준의 손에 이끌려 드레스를 고르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서 YX 호텔로 끌려온 참이었다.
“네, 3 번 연회장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성준은 연혜빈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대표님께서는 업무 때문에 조금 늦으실 듯합니다. 지금 바로 대표님을 모시러 갈 테니까 연혜빈 씨께서 먼저 들어가 계세요.”
3 번 연회장이라니… 참 기막힌 우연이었다.
쓰게 웃으며 초대장을 건네받은 연혜빈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러고는 이내 차에서 내려 호텔로 향했다.
연회장 입구에 다다른 연혜빈의 눈앞에 결혼식 날의 모든 장면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많은 이들의 환호 속에서 송시훈과 입을 맞추고 달콤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었는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휘청거리는 연혜빈의 모습에 지나가던 종업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손님?”
“네, 괜찮아요.”
연혜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송시훈의 차가운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질끈 깨문 연혜빈은 이내 성큼성큼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송시훈과 결혼할 당시 설레고 행복한 마음만큼 송시훈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연회장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그동안 많이 야윈 상태였지만 명문가 출신에 워낙 본바탕이 좋은 터라 검은색 튜브톱 트임 롱드레스를 입은 연혜빈은 단연 연회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다.
샹들리에의 휘황찬란한 빛이 연혜빈의 가녀린 어깨에 아름답게 부서져 내렸고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드리울 때마다 어딘가 가냘프고 아련한 분위기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