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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진상

  • “연혜빈 씨 할머님 병원비는 저희 대표님께서 정산하셨습니다.”
  • 그렇게 말하며 운전기사가 지급 명세서를 연혜빈에게 내밀었다.
  •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명세서를 받아들고서 그 위에 적힌 구입 약품을 확인하고 안도한 연혜빈은 이내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 “송시훈이 그쪽을 보낸 거죠? 날 데려오라고요, 맞죠?”
  • 연혜빈은 송시훈이 로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운전기사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 “송 대표님은 연혜빈 씨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고 연혜빈 씨를 개에 비유하셨는데 아직도 그분께 희망을 품고 계십니까?”
  • 그렇게 말하며 운전기사는 정차되어 있는 차량의 뒷좌석 차 문을 열어젖혔다.
  • “타시죠.”
  • 그 말에 연혜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차량 뒷좌석에는 낯선 남자가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언뜻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서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고압적인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 “그쪽 대표님과는 처음 보는 사이에요…”
  • “연혜빈 씨가 궁금해하시는 모든 것들을 저희 대표님께서 전부 알려주실 겁니다.”
  • 의아해하는 연혜빈의 표정에 운전기사는 이내 말을 덧붙였다.
  • “한 마디 더 말씀드리자면, 저희 대표님께서는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 연혜빈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 차 안에 앉아있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진실이 너무 궁금했던 연혜빈은 이를 악물고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벌어진 상처에서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 다리를 쩔뚝거리는 연혜빈의 모습을 발견한 운전기사는 재빨리 상처 부위를 싸매주고는 차량 트렁크에서 꺼낸 샤워 타월을 연혜빈에게 내밀었다. 운전기사의 손에서 샤워 타월을 받아든 연혜빈은 몸에 걸친 채 차에 올라타고서 남자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 이내 차에 시동이 걸리며 빠르게 신혁 그룹을 빠져나왔다.
  • 연혜빈은 차 안의 불빛을 빌려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있는 남자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어쩐지 낯익은 옆모습이었다.
  •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한참 머뭇거리던 연혜빈은 이내 숨 막힐 듯한 정적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 “나한테 하려던 얘기가 뭐예요?”
  •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싸늘한 눈동자로 연혜빈의 얼굴을 훑었다. 그 시선은 이내 그녀의 목 언저리에 멈추었다.
  • “목걸이 돌려줘.”
  • 낮고 차가운 목소리에 연혜빈은 반사적으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는 흠칫했다. 돌려달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불어 이 목걸이가 눈앞의 남자가 남겨두고 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도. 연혜빈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몸서리를 쳤다.
  • “그, 그날 밤 남자가 당신이었어?”
  • 남자의 낯익은 옆모습은 일전에 송시훈이 집어던진 사진에서 보았던 옆모습과 똑같았다!
  • “문자도 당신이 보낸 거지?”
  • 연혜빈이 날카롭게 추궁하며 남자의 뺨을 후려갈기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 “짐승만도 못한 자식!”
  • “난 문자를 보낸 적 없어. 하지만 그 방은 내가 예약한 거 맞아.”
  • 그렇게 말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남자는 연혜빈을 힐끗 바라보았다.
  • “그날 밤 어쩌다 내 방에 들어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 그 말에 연혜빈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 그러고 보니 그날 밤, 2588호 실의 문을 두드리려 한 순간, 분명 누군가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를 룸 안으로 밀어 넣었었다.
  • “그게 무슨 웃기지도 않은 소리야!”
  • 연혜빈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 “그 방을 당신이 예약한 거라면 당신 말고 누가 나한테 그런 메시지를 보내?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나한테 그런 짓을 저지른 거야?”
  • 그러자 반우석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 “생각보다 많이 멍청하네!”
  • “…”
  • 연혜빈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연혜빈의 목에서 목걸이를 낚아챈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목걸이를 닦으며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
  • “호텔로 가. 우리 연혜빈 아가씨께서 진실을 알고 싶어 하신다.”
  • “네, 알겠습니다.”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란휴르 호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 문득 그날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연혜빈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 다리를 거즈로 감싼 데다 온몸이 흠뻑 젖은 연혜빈은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몰골이었다.
  • 반우석을 따라 호텔 룸에 들어선 연혜빈은 몸에 걸친 샤워 타월을 움켜쥐며 눈살을 찌푸렸다.
  • “네가 말한 진실이 뭔데?”
  • 그 말에 반우석이 옆에 있던 운전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 그러자 운전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리모컨을 들고서 벽에 걸린 티브이 전원을 켰다. 곧이어 티브이 화면에 누군가의 방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 아무래도 실시간 모니터링인 것 같았다.
  • 연혜빈은 이내 화면으로 들어오는 낯익은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이제는 전 남편이 되어버린 송시훈과 그녀의 절친인 윤지은이었다!
  • “훈아, 드디어 소원을 이룬 걸 축하해.”
  • 그렇게 말하며 송시훈을 뒤에서 끌어안은 윤지은의 가냘픈 두 손이 송시훈의 가슴을 끈적하게 쓸어내렸다.
  • “근데 너 진짜 독하다. 어떻게 연혜빈한테 땡전 한 푼 남겨주지 않을 수 있어? 걔네 할머니 치료비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 “어차피 곧 죽을 노친네, 알게 뭐야.”
  •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연 송시훈은 몸을 돌려 윤지은의 입술을 진득하게 베어 물었다.
  • “당신 덕분에 주주들의 약점을 잡았고 그들의 손에서 순조롭게 신혁 그룹의 지분을 가로챘어. 신혁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게 된 건 모두 당신 덕분이야.”
  • “내가 내 애인을 돕지 않으면 누굴 도와?”
  • 그렇게 말하며 윤지은이 송시훈의 가슴을 가볍게 내리쳤다.
  • “경찰서 쪽은 이미 얘기를 해두었어. 설령 연혜빈이 살아남는다 해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근데 훈아, 너 생각보다 독한 사람이더라? 양부, 양모한테도 손을 대고?”
  • 두 사람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연혜빈은 윤지은의 마지막 한 마디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어질어질했다.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연혜빈은 단단한 가슴 위로 쓰러졌다.
  • 그녀의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송시훈에게 살해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