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혜빈은 뻣뻣해진 다리를 움직이며 윤지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이 파리하게 굳었다.
“너, 이게…”
남자아이는 세 살은 족히 됨 직한 모습이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윤지은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몸을 돌렸다. 연혜빈을 발견한 윤지은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혜빈아, 여, 여긴 어쩐 일이야?”
그 말만 내뱉고서 도로 몸을 돌린 윤지은은 이내 아이를 안고서 황급히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재빨리 뒤쫓아간 연혜빈은 윤지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서 뺨을 후려갈겼다.
“나한테 왜 그런 거야? 난 시골에서 상경한 네가 불쌍해서 대학교 학비를 지원하고 신혁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 줬어. 이 집도 내 돈으로 마련한 거잖아.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송시훈과 윤지은이 붙어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큰 아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정말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손잡고 그녀를 기만해 왔었다. 두 사람의 뼈저린 배신에 연혜빈은 가슴을 갈퀴로 긁어대는 것처럼 아팠다.
연혜빈은 핏발이 선 눈으로 윤지은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쉼 없이 뺨을 내리쳤다. 옆에서 고용인들이 사력을 다해 뜯어말렸지만 연혜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돌연 옆에서 나타난 큼직한 손바닥이 연혜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서 옆으로 힘껏 밀쳤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연혜빈은 질식할 것 같은 고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연혜빈은 지극히 무감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송시훈을 발견했다.
“미쳤어?”
“이유가 뭐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연혜빈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우리 아빠는 양친 모두 돌아가신 너를 집에 데려와서 친아들처럼 키웠어! 연 씨 가문의 모든 것을 너한테 남겨 주신 분들을 대체 왜 죽인 거야!”
그 말에 송시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윤지은을 시킨 일이라 윤지은과 자신 외에는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런데 연혜빈은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것이지.
송시훈의 바로 앞까지 다가선 연혜빈은 송시훈을 올려다보며 잇새로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날 사력을 다해 모함하고 다른 남자의 침대로 보낸 저의가 뭐야?”
“연 씨 가문을 망가뜨리고 널 망가뜨리고 싶었으니까!”
송시훈이 서슬 퍼런 눈으로 연혜빈을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신혁은 애초부터 너희 아버지 것이 아니었어. 30여 년 전, 너희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께서 함께 신혁을 설립하셨고 최대 주주는 우리 아버지셨어. 너희 아버지는 신혁에 실권이 없는 자신의 자리에 불만을 품었고 회사가 막 상장되자마자 우리 가문을 피로 물들였지. 난 친구 집에서 외박하고 있었던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고…”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연혜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아빠는 당신을 친아들로 생각했어. 연 씨 가문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내어주며 당신과 날 결혼시켰고…”
“그건 너희 아버지의 죄책감 때문이야. 그 사람이 과연 좋은 마음으로 날 받아들인 거라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굽힌 송시훈은 음산한 빛을 내는 눈동자로 연혜빈을 내려다보며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내 후견인이 되어 우리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신혁 그룹의 지분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지!”
사실 처음에는 송시훈도 까맣게 모르고 지냈던 사실들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로부터 사건의 진상을 전해 들었다.
그 즈음 지나치게 잘해주시는 양부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송시훈은 모든 게 양부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호의임을 깨닫고는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창백하게 질려있는 와중에도 고집스러운 연혜빈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던 송시훈은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연혜빈의 머리채를 움켜잡고서 대문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송시훈이 서슬 퍼런 어조로 경고했다.
“또다시 눈에 띄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굳게 닫힌 문을 지켜보며 연혜빈은 절망했다.
십여 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가, 하늘이 그녀에게 보낸 천사인 줄 알았는데 복수심에 불탄 악마일 줄은 몰랐다.
연 씨 가문을 망가뜨리고 그녀도 망가뜨린 장본인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연혜빈은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안혜빈이 길을 건너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디려던 찰나, 돌연 튀어나온 차량 한 대가 플래시를 켠 채 속력을 높이며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눈부신 플래시에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린 연혜빈은 이내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미동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