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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내가 도와줄게

  • 문득 기분이 언짢아진 반우석은 들고 온 죽을 한 모금 들이켜고서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이내 여자의 입에 입을 맞추고서 치아를 벌리고 억지로 죽을 먹였다.
  • 배가 많이 고팠던 탓인지 연혜빈은 본능적으로 죽을 삼켰다.
  • 그렇게 입으로 죽을 떠먹이다 보니 죽 한 그릇이 금세 바닥을 보였다. 그릇이 말끔히 비워지자 잔뜩 일그러졌던 반우석의 미간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 연혜빈의 목덜미를 받쳤던 손을 빼내기 위해 팔을 움직인 찰나, 연혜빈이 반우석의 손을 꼭 잡고서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 “엄마…”
  • 동아줄을 잡은 듯 중얼거리던 연혜빈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이내 반우석의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 “보고 싶어… 나도 데려가…”
  • 반우석은 냉랭한 눈동자로 연혜빈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연혜빈, 정신 차려. 널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 자신뿐이야.”
  • 그러고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손을 떼어내고는 방을 나섰다.
  • 꿈속에서 연혜빈은 돌아가신 지 오래된 부모님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은 왜 하필이면 송시훈을 사랑했냐고 꾸짖으며 송시훈에게 회사를 빼앗긴 그녀의 어리석음을 질책했다.
  • 숨이 막힐 듯한 힐난에 연혜빈은 제발 그녀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렸다.
  •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얘기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널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 자신뿐이야…”
  • 번쩍 눈을 뜬 연혜빈의 시야에 맨 먼저 들어온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 어쩌면 할머니는 무사할 수도 있었다. 윤지은이 할머니한테 그녀가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소식을 전하지만 않았어도 할머니가 화병으로 죽을 일 따위 없었다!
  • 신혁 그룹을 탈환하고 부모님의 원수를 갚은 뒤에 송시훈과 윤지은에게 받은 만큼 피로 되돌려줄 것이다!
  • 흐릿하던 연혜빈의 두 눈이 서늘한 빛을 내며 가라앉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연혜빈은 의자에 놓인 긴 원피스로 갈아입고서 침실을 나섰다.
  • 계단을 내려간 연혜빈은 이내 다이닝 룸에서 그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 옅은 회색 조끼에 셔츠 차림인 남자는 얼굴에 냉기를 뚝뚝 흘리고 있었는데 방금 퇴근한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식사를 하면서 성준이 전하는 보고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 “연혜빈 씨.”
  •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는 연혜빈을 발견한 성준이 연혜빈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 “몸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연혜빈은 이내 무심코 되물었다.
  • “제가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나요?”
  • “꼬박 일주일 동안 잠들어 계셨습니다.”
  •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요?”
  • 성준의 대답에 화들짝 놀란 연혜빈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 하지만 일주일 내내 잠들어 있었던 것치고는 굶주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 그 순간, 주방에서 걸어 나온 고용인이 연혜빈의 앞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 연혜빈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힐끔거렸다. 묻고 싶은 얘기들이 산더미 같았지만 성준의 보고에 골몰해있는 모습에 연혜빈은 단념하고 묵묵히 수저를 움직였다.
  •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의자에서 일어서는 남자의 모습에 연혜빈도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 반우석을 따라 침실로 들어선 연혜빈은 조끼를 벗으며 욕실로 향하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입술을 깨물고서 용기 내어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 “내, 내가 도와줄게.”
  • 남자의 훤칠한 키 때문에 연혜빈은 손을 높이 들어야지 간신히 그의 셔츠 단추에 손이 닿을 수 있었다.
  •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연혜빈을 내려다보았다.
  • 서로의 숨결마저 느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코끝을 간지럽히는 반우석의 차가운 체취에 단추를 집은 연혜빈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연혜빈은 남자의 셔츠를 잡은 채 한참 동안 낑낑거렸지만 단추 하나 풀지 못했다.
  • 그 모습에 반우석이 담담한 얼굴로 연혜빈의 손을 뿌리쳤다.
  •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 “난…”
  • 연혜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경찰서에서 보석해 줘서 고마웠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었어.”
  • 반우석이 없었다면 연혜빈은 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꼼짝없이 유치장에 갇힐 뻔했다. 할머니의 장례도 눈앞의 남자가 사람을 붙여둔 덕분에 순조롭게 치를 수 있었다.
  • 그동안 받은 도움에 보답하고 싶어도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오직…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연혜빈은 망설임 없이 원피스 뒤에 달린 지퍼를 끌어내렸다.
  • 치마가 바닥에 떨어지며 맨살에 차가운 공기가 닿자 연혜빈은 흠칫 몸을 떨었다.
  •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던 반우석의 호흡이 저도 모르게 살짝 거칠어졌다.
  • 몸 구석구석을 좇는 반우석의 집요한 시선에 문득 기분이 이상해진 연혜빈은 손으로 가슴을 가린 채 기어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제발 도와줘. 신혁 그룹을 꼭 되찾아야 돼…”
  • 신혁 그룹은 부모님이 그녀에게 물려준 유산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 “그래서 내 앞에서 옷을 벗은 거야?”
  • 반우석이 싸늘하고 시니컬한 눈동자로 연혜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업소 아가씨들은 손님을 유혹할 때 적어도 아양 떨 줄이라도 알지. 이건 뭐 시체도 아니고. 피부가 조금 흰 것 외에는 아무런 메리트도 없는데?”
  • 유일하게 남은 자존심이 무참하게 짓밟히자 연혜빈은 순간 치솟는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그때, 남자의 휴대전화가 울려 퍼졌다.
  • “난 시체에 관심 없으니까 얼른 옷 입고 네 방으로 돌아가.”
  • 덤덤한 어조로 그 한 마디만 내뱉은 남자는 이내 창가로 다가가 전화를 받았다.
  • 바닥에 떨어진 원피스를 황급히 주워 입은 연혜빈은 고개를 떨군 채 허겁지겁 반우석의 방을 나섰다.
  •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근 연혜빈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르 주저앉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남자의 목소리에 수치스럽고 분해진 연혜빈은 팔로 머리를 감쌌다.
  • 남자의 정체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고 경찰서 서장이 직접 그녀를 석방한 지난 일들에서 남자의 정체가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반증한 셈이었다.
  • 연혜빈은 남자가 그녀의 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것 말고 그녀가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 하지만 그런 그녀의 예상과 달리 남자는 방금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