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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더러워

  • 연혜빈의 팔을 잡아끌고서 구청 로비로 들어선 송시훈은 거칠게 의자 위로 연혜빈을 눌러 앉히며 싸늘한 어조로 내뱉었다.
  • “이혼해!”
  • “싫어!”
  • 이혼이라는 두 글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연혜빈은 송시훈의 팔을 잡은 채 애걸복걸 매달렸다.
  • “여보, 난 이혼 안 해. 제발… 어릴 적부터 내가 여보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잖아. 이제 내 곁에는 여보밖에 없어.”
  • “너처럼 더러운 여자는 사양이야!”
  • 그 말에 연혜빈은 흠칫 몸을 떨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퇴색했다. 동아줄을 잡듯 송시훈의 소매를 힘껏 움켜쥐고 있던 연혜빈의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 더러워?
  • 그 순간, 웨이브 진 긴 머리에 요염하고 성숙한 여인이 황급히 구청 로비로 들어왔다.
  • “송 대표님, 말씀하신 서류 가져왔습니다.”
  • 가까이 다가서는 여인을 확인한 연혜빈의 파리한 안색에 희망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 “지은아, 마침 잘 왔어. 시훈 씨 좀 말려줘. 나 이혼하기 싫단 말이야. 예전에도 시훈 씨랑 다툴 때마다 네가 화해시켜줬잖아.”
  • 송시훈과 같은 대학을 나온 윤지은은 그들 부부와 평소에도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 매번 송시훈과 사이가 틀어질 때마다 윤지은의 설득 덕에 둘은 빠르게 화해했었다. 연혜빈은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희망의 동아줄을 잡듯 윤지은의 팔을 부여잡고 애원했다.
  • 하지만 연혜빈의 애원조에 윤지은은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우리가 아무리 친하게 지내도 네가 호텔에서…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널 도울 수 없을 것 같아.”
  •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사이, 송시훈이 서류를 펼쳐 들며 입을 열었다.
  • “사인해!”
  • 그 말에 연혜빈은 송시훈이 들이민 서류를 힐긋 바라보았다. 문득 결혼하기 직전에 송시훈이 그녀의 권익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변호사를 섭외하여 혼인관계가 존속하는 동안에 송시훈이 불륜을 저지를 경우, 빈털터리로 나가겠다는 내용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 “싫어, 안 해!”
  • 연혜빈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여보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제발 이혼만은…”
  • 하지만 연혜빈의 거듭된 애원에도 송시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강압적으로 연혜빈의 손에 펜을 쥐여주며 서류에 서명을 하고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구청 직원들을 향해 서늘하게 말했다.
  • “이혼 수속 부탁드립니다!”
  • 구청 로비에 들어온 지 2 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연혜빈의 손에 이혼 증명서 한 장이 쥐어졌다.
  • “송시훈!”
  • 차갑고 매몰찬 남자의 뒷모습에 울먹이며 쫓아나간 연혜빈은 윤지은과 함께 차에 올라타는 송시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 온종일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 잠시 헛 게 보였나. 어쩐지 윤지은이 송시훈의 뺨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 연혜빈이 넋이 나간 얼굴로 떠나는 차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 “연혜빈 씨, 할머님께서 위독하세요. 얼른 병원으로 오세요!”
  • “네?!”
  • 연혜빈은 눈물을 훔치며 택시에 올라탔다.
  • 지난해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뒤로 할머니도 폐병으로 줄곧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그나마 항상 옆에 있어주는 송시훈이 있었기에 간신히 버텨왔던 것인데 이제는…
  • 병실에 도착하자 며칠 전보다 더욱 상태가 나빠진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간신히 숨을 붙잡고 계신 것 같았다.
  • 연혜빈이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 할머니가 병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뺨을 호되게 내리쳤다.
  • “애초에 내가 송시훈은 연 씨 가문의 양자일 뿐이니 절대 마음을 주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도 듣는 척도 하지 않더니, 이제 어떡할 거야! 네 아버지가 피땀을 흘리며 일궈낸 회사를 네 손으로 망가뜨린 거야!”
  • 매몰차게 내리꽂히는 따귀에 막 딱지가 앉기 시작한 상처에서 또다시 핏방울이 솟구쳤다.
  • “할머니, 신혁 그룹은 아직 내 손에 있어요.”
  • 비록 빈털터리로 쫓겨난 몸이지만 수중에 있는 신혁 그룹은 여전히 그녀의 것이었고 그녀는 여전히 신혁 그룹의 최대 주주였다.
  • 확신에 찬 연혜빈의 목소리에 할머니는 씩씩거리며 옆에 놓인 신문지를 들어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 “네 눈으로 직접 봐!”
  • 품 안으로 던져진 신문을 들고서 펼친 연혜빈은 이내 오늘 아침 7 시에 발표한, ‘송시훈, 신혁 그룹의 지분 63%를 보유해 신혁 그룹을 완전히 지배하다!’라는 경제 기사 헤드라인을 발견했다.
  • 기사를 읽어내려가던 연혜빈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화등잔만 해졌다.
  • “그 사람이 무슨 수로 이렇게 많은 지분…”
  • 연혜빈은 그제야 결혼하고 한 달 뒤에 송시훈이 그룹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수차례 지분을 요구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 어차피 부부간 공유 재산이라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었다.
  • 그런데 송시훈이 그녀의 무조건적인 신임을 이용해 그녀의 손에서 신혁 그룹을 빼앗아갈 줄은 몰랐다.
  • “이 나한테 너처럼 멍청한 손녀가 있다니. 당해도 어떻게 그 자식한테 당해!”
  • 그 순간, 연혜빈에게 신랄하게 욕설을 퍼부어대던 할머니는 안색이 돌연 파리하게 질리더니 가슴을 움켜쥔 채 병상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