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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연혜빈과 개는 들어갈 수 없다

  • “할머니!”
  • 사색이 된 얼굴로 고함을 지르던 연혜빈은 황급히 달려나가 의사를 불러왔다.
  • 응급실로 옮겨지는 할머니의 모습에 연혜빈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복도를 서성거렸다.
  • 할머니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혔던 수술실 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산소 호흡기를 착용한 채 나왔다.
  • “환자분 맥박은 정상적으로 돌아온 상태이지만 앞으로 한동안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환자분께 투입될 약들이 시중에 얼마 없는 특급 약품들이라 의료비를 정산해야지만 치료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는 의사의 얘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연혜빈은 이내 의료비를 납부하기 위해 원무과로 향했다.
  • 하지만 그동안 밀린 병원비와 앞으로 쓰일 약물 비용을 결제하려고 카드를 긁는 순간, 그녀의 명의로 된 모든 카드들이 정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 연혜빈은 황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윤지은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지은아, 시훈 씨한테 내 카드가 왜 정지되었는지 이유를 물어봐 줄 수 있어? 우리 할머니 치료받으려면 돈이 많이 필요해…”
  • “혜빈아, 설마 잊은 거야?”
  • 윤지은이 연혜빈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며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 “넌 빈털터리로 쫓겨난 거야.”
  • 그러고는 연혜빈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 차가운 현실을 상기시켜주는 윤지은의 한 마디에 연혜빈은 목이 메고 눈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곧 병상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떠올리고는 지체 없이 신혁 그룹으로 향했다.
  • 대체 왜 신혁 그룹을 그녀의 손에서 빼앗아야 했는지, 단 한 번의 잘못 때문에 빈털터리로 쫓을 만큼 모질게 굴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송시훈에게 확실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 신혁 그룹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종종걸음으로 빗속으로 뛰어든 연혜빈이 신혁 그룹 건물을 들어가려던 찰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힘껏 밀쳤다. 거센 힘의 반동에 균형을 잃은 연혜빈은 몸을 휘청이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 시훈 씨를 만나야 돼요…”
  •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바닥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연혜빈은 경비원의 팔을 잡고서 애원했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굵은 빗방울에 원체도 창백한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다.
  • “우리 할머니 약 사야 돼요. 아니면 우리 할머니 죽는단 말이에요…”
  • 그러자 경비원은 성가시다는 얼굴로 연혜빈을 더욱 힘껏 밀치더니 문 앞에 세워둔 팻말을 들고서 그녀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 “혜빈 아가씨, 이 위에 뭐라 쓰여있는지 눈 크게 뜨고 보세요!”
  • 연혜빈은 얼굴 위로 쏟아지는 빗물을 훔치며 눈에 힘을 주었다.
  • 그러자 ‘연혜빈과 개는 들어갈 수 없다!’라고 쓰인 문장이 보였다.
  • “송시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 빗물과 섞인 눈물이 연혜빈의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송시훈을 처음 만난 건 세 살 때였다. 평소랑 다름없이 출근한 부친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낯선 남자아이와 함께였다.
  • “빈아, 이 아이 부모님께서 사고로 돌아가셨어. 이제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될 거고 앞으로 네 오빠야.”
  • 그때 당시 여섯 살이었던 송시훈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싱그러운 햇살처럼 미소 지었다.
  • “안녕, 작은 공주님. 앞으로 내가 지켜줄게!”
  • 송시훈은 그날 했던 약속처럼 세 살 적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지켰고 연 씨 가문을 지켜왔었다.
  • 연혜빈의 마음속에서 송시훈은 진작부터 가족이었고 그녀의 왕자였다.
  • 연혜빈은 송시훈의 애정을 받으며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하릴없이 쇼핑이나 하며 착하고 말 잘 듣는 송시훈의 여자로 있기만 하면 충분했었다.
  • 그런데 그 남자가 어찌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단 말인가.
  • 송시훈은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든 거로도 모자라 개만도 못하다고 비꼬았다.
  • 단지 그녀가 더러워져서?
  • 회사 건물을 드나들던 직원들은 회사 입구에 주저앉아 있는 연혜빈의 모습에 하나둘씩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그 얘기 들었어? 혜빈 아가씨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랑 호텔에 갔었대.”
  • “송 대표님께서 혜빈 아가씨와 이혼하셨다고 들었는데 백 번 천 번 잘하신 일이야!”
  • “신혁에 송 대표님이 없었다면 혜빈 아가씨의 멍청한 머리로는 한 달도 못 가 망했을 거야!”
  • “…”
  • 한편, 신혁 그룹 대표 사무실. 오너 의자에 앉아 건물 입구의 감시 카메라를 통해 바닥에 주저앉아 비를 맞고 있는 초라한 여인을 지켜보던 송시훈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 하지만 송시훈은 이내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소년소녀가 환히 웃고 있는 앨범을 휴지통에 집어던졌다.
  • “연혜빈, 날 원망하지 마. 난 단지 너희 가문에서 나한테 진 빚을 갚은 것뿐이야!”
  • 연혜빈이 아무리 경비원에게 애원해도, 심지어 신혁 그룹의 사장에게 도움을 청하려 해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 심지어 방해가 된다며 그녀를 길가로 밀쳐졌다.
  • 뒷걸음질 치다가 난간에 다리를 부딪치며 철사에 다리를 긁힌 연혜빈은 너무 아픈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연혜빈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줄곧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 하루 만에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날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거센 빗줄기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그 순간, 연혜빈의 옆으로 마이바흐 한 대가 천천히 멈추어 서더니 이내 조수석에서 내린 남자가 우산을 들고서 그녀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