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은 잠시 정신을 추스르려 했다. 하영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하영은 텅 빈 두 눈으로 그저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욕실 문이 열리는 순간에야 그녀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 앉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다시 가면을 쓰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애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운 씨 진짜 너무하네요. 미리 얘기하지, 갑자기 이렇게 늦은 시각에 불러내고… ”
억울한 듯한 음성이었다.
최성운은 머리에 있는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고 살짝 벌어져 있는 가운 틈으로 그의 탄탄한 몸매가 보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어 하영을 바라보았다.
하영의 연기는 나날이 발전해갔다. 1년이란 시간 동안 함께 했는데 하영이 그동안 쭉 연기하면서 지냈다는 걸 최성운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최성운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차가운 목소리로 낮게 대꾸했다.
“ 다음엔 좀 더 살살할게. ”
말을 마치고 최성운은 수건을 그대로 침대 위로 던지고는 옷장을 열어 슬랙스를 꺼내고 가운을 벗어 던졌다.
“ 성운 씨 저번 달 3일에 출장 가서 우리 한 달 넘게 못 만났는데. ”
하영은 침대 위에서 내려오며 최성운에게 걸어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 여기 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가려고요? ”
하영은 습관처럼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 내일 아침에 가요. 저랑 좀 더 같이 있어요. 저 성운 씨 너무 보고 싶어서 꿈도 성운 씨 꿈만 꿨다니깐요. ”
최성운은 하영의 더듬대는 손을 떼어내면서 몸을 돌려 그녀를 자신과 서랍 사이에 가뒀다. 날이 선 눈빛이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과 완벽한 몸매를 훑어보았다. 하영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눈치도 엄청 빨라서 만난지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최성운의 몸과 마음을 전부 기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최성운은 하영의 턱을 들어 올리며 덤덤한 어투로 물었다.
“ 하영아, 너 나랑 만난 지 얼마나 됐지? ”
“ 1년 거의 다 돼가죠. ”
순간이었지만 하영의 눈동자에 뜻모를 빛이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이내 얼굴에 미소를 옅게 띠며 되물었다.
“ 그건 왜 물어봐요? 설마 저한테 질리신 거예요? ”
하영은 자신이 감정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최성운은 그걸 빤히 꿰뚫고 있었다.
“ 때가 되면 비서한테 연락하라고 할게. ”
최성운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자신의 겉옷 주머니에서 가죽 지갑을 꺼내 들더니 미리 준비해두었던 수표를 건넸고, 하영은 그것을 건네받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 고마워요, 성운 씨. ”
수표 금액이 얼마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하영은 돈에 환장한 사람처럼 수표에 입을 맞추고는 서랍 안에 넣고는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욕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영은 욕조 안에 물을 가득 받고 그 안에 몸을 눕혔고 밖에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영은 두 눈을 감은 채로 욕조 안에 누워 최성운이 방금 전 한 말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1년을 채우면 이젠 자신과 안 만날 거라는 얘긴가?
그리고 그것이 하영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었다.
1년 전 하영은 두 번이나 배신을 당하면서 옥상에서 뛰어내릴 뻔했었지만 조금 지나 깨달았다.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 건지. 하영은 누구보다도 잘 사리라 다짐했다. 가장 능력 있고 권력 있는 남자를 만나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태껏 자신의 엄마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고 최성운과 만나면서 그 사람이 자기 생각처럼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발을 빼려던 참이었다.
1년짜리 계약을 맺지만 않았어도 하영은 오래전에 그를 떠났을 것이다.
…
이튿날 아침 알람이 울리고 어젯밤 고되고 힘들었어도 하영은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옷을 갈아입는데 삼십 분 정도 걸리고 하영은 얼른 집을 나섰다.
1년 전, 하영은 최성운의 인맥을 통해 고성 방송국에 입사했었다. 그러나 실력 없는 낙하산이 아니었던 하영은 자신의 외모와 입담을 통해 두 개의 예능 프로그램으로 뜨게 되면서 방송국의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하영은 오늘 아침 일찍 방송국에 도착해서 게스트들과 만나야 했고 아주 늦은 시각에야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방송국으로 가는 도중 하영은 핸드폰을 켜 유정이 보내온 동영상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