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9화 정말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는 건 아니겠지

  • “ 그 사람이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다고? ”
  • 하영은 처음 안 사실에 물었다.
  • “ 짝사랑하는 상대가 결혼한 게 너무 슬퍼서 정절을 안 지킨 건 아니고? ”
  • “ 오래전에 지성이가 얘기해 준 거야. 나도 잘은 기억 안 나. ”
  • 유정은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서 노력했다.
  • “ 그 짝사랑 상대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됐는데 깨어날 확률은 거의 없대. ”
  • 하영은 그제야 깨닫고 그것이 생각났다.
  • 최성운과 처음 만났을 때 최성운은 술에 잔뜩 취해있었다. 모두들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는데 그 사람 혼자 구석진 곳에 조용히 앉아있었는데 얼굴에는 쓸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 그날 밤 하영은 복수를 위해서, 돈을 위해서 최성운을 붙잡았고 호텔에 가서야 최성운이 얼굴만 무섭게 생겼지, 바로 싸는 바람에 하영은 무척이나 얼떨떨했다. 그때 하영은 최성운이 그 방면으로는 안되나보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그때 처음이라 너무 긴장한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둘 모두 처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 하영은 그 기억들을 떨쳐내며 눈썹을 추켜세우며 웃어 보였다.
  • “ 그러길래 이별 선물을 이렇게 많이 주는 거지. 그런데 이미 끝난 사이에 주는 걸 안 받으면 나만 손해겠지. ”
  • “ 네가 그렇게 쿨하게 나오니까 마음이 놓인다. ”
  • 과자를 한입 베어 문 유정의 뺨이 볼록한 것이 만두 같았다.
  • “ 그런데 난 최성운이 계속 너한테 질척댈까 봐 걱정되는데. 너 진짜 조심해. 다른 사람 대체품 같은 거 되지 않게. 요즘 남자들 다른 건 몰라도 짝사랑 상대가 있는 게 가장 무서운 거야. ”
  • 하영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매서운 눈길로 방금과 달리 날이 선 말투로 말했다.
  • “ 돈도 충분히 받았고, 나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어. ”
  • “ 내가 지성이한테 너 대신 물어봐 주라고 할게. ”
  • 유정은 하영이 말한 일이란 게 어떤 걸 가리키는 건지 알고 있었다.
  • “ 지성이가 아는 사람도 그쪽에서 일하는데 직급이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그 감시카메라 영상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야. ”
  • “ 아주 작은 가능성도 난 놓치고 싶지 않아. ”
  • 하영이 말했다. 그녀도 최성운한테 부탁해 사업자들에게 연락해 엄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혀낼 생각을 했었지만 최성운처럼 똑똑한 사람은 자신이 이용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고, 자신 또한 그에게 뒷조사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 “ 영아, 그 찌질한 새끼는 아직도 너한테 연락해? ”
  • “ 어디서 내 번호를 안 건지 매일 나한테 문자를 보내길래 차단 걸었지. ”
  • 남지호 얘기에 속이 불편해진 하영은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 “ 나 병원 갔다 올게. ”
  • “ 너 혼자? 내가 같이 가 줄까? ”
  • 유정은 손에 묻은 과자 가루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 “ 한 달 넘게 생리 안 왔다면서, 진짜 임신한 건 아니겠지? ”
  • 하영은 유정의 이마를 튕기면서 어이없다는 듯 얘기했다.
  • “ 그럴 일 없어. 내가 할 때마다 다 지켜봤는데. 아마 스트레스 때문에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긴 걸지도 모르지. ”
  • “ 그래. ”
  • 유정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 메뉴 보냈으니까 올 때 장 봐서 와. ”
  • 하영은 웃으며 대꾸했다.
  • “ 알았어, 갈게. ”
  • 하영은 가벼운 표정이었지만 유정의 말 때문에 속이 심란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계속 아랫배를 쳐다봤다. 최성운과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확인했었기에 임신할 리가 없었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으로 진짜 임신이라도 한 거라면?
  • 생각할수록 조마조마해져 그녀는 인터넷에서 미리 예약해놓고 바로 산부인과로 향했지만 그녀 앞에 줄이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하영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고 새로 나온 프로그램의 대본을 보고 있었다.
  • 방송국에서 예능 프로그램 진행자들 중에서도 하영이 가장 잘나갔고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두 개도 모든 예능 중에서도 시청률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렇기에 방송국에서는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겠다는 마음으로 하영에게 새로 나온 프로그램 하나를 더 맡겼다.
  • 2주에 한 번 하는 예능으로 셀러브리티 인터뷰를 위주로 그들의 일상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를 필요도 없고 머리를 쓸 필요도 없는 데다가 출연료도 두 배는 더 되었기에 하영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하영 씨. ”
  • 하영이 대본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향수 냄새에 핸드폰을 끄고 고개를 들어보니 갸름한 얼굴에 반듯한 눈썹의 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 정말 공교롭게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