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운과 처음 만났을 때 최성운은 술에 잔뜩 취해있었다. 모두들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는데 그 사람 혼자 구석진 곳에 조용히 앉아있었는데 얼굴에는 쓸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날 밤 하영은 복수를 위해서, 돈을 위해서 최성운을 붙잡았고 호텔에 가서야 최성운이 얼굴만 무섭게 생겼지, 바로 싸는 바람에 하영은 무척이나 얼떨떨했다. 그때 하영은 최성운이 그 방면으로는 안되나보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그때 처음이라 너무 긴장한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모두 처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하영은 그 기억들을 떨쳐내며 눈썹을 추켜세우며 웃어 보였다.
“ 그러길래 이별 선물을 이렇게 많이 주는 거지. 그런데 이미 끝난 사이에 주는 걸 안 받으면 나만 손해겠지. ”
“ 네가 그렇게 쿨하게 나오니까 마음이 놓인다. ”
과자를 한입 베어 문 유정의 뺨이 볼록한 것이 만두 같았다.
“ 그런데 난 최성운이 계속 너한테 질척댈까 봐 걱정되는데. 너 진짜 조심해. 다른 사람 대체품 같은 거 되지 않게. 요즘 남자들 다른 건 몰라도 짝사랑 상대가 있는 게 가장 무서운 거야. ”
하영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매서운 눈길로 방금과 달리 날이 선 말투로 말했다.
“ 돈도 충분히 받았고, 나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어. ”
“ 내가 지성이한테 너 대신 물어봐 주라고 할게. ”
유정은 하영이 말한 일이란 게 어떤 걸 가리키는 건지 알고 있었다.
“ 지성이가 아는 사람도 그쪽에서 일하는데 직급이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그 감시카메라 영상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야. ”
“ 아주 작은 가능성도 난 놓치고 싶지 않아. ”
하영이 말했다. 그녀도 최성운한테 부탁해 사업자들에게 연락해 엄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혀낼 생각을 했었지만 최성운처럼 똑똑한 사람은 자신이 이용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고, 자신 또한 그에게 뒷조사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 영아, 그 찌질한 새끼는 아직도 너한테 연락해? ”
“ 어디서 내 번호를 안 건지 매일 나한테 문자를 보내길래 차단 걸었지. ”
남지호 얘기에 속이 불편해진 하영은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 나 병원 갔다 올게. ”
“ 너 혼자? 내가 같이 가 줄까? ”
유정은 손에 묻은 과자 가루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 한 달 넘게 생리 안 왔다면서, 진짜 임신한 건 아니겠지? ”
하영은 유정의 이마를 튕기면서 어이없다는 듯 얘기했다.
“ 그럴 일 없어. 내가 할 때마다 다 지켜봤는데. 아마 스트레스 때문에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긴 걸지도 모르지. ”
“ 그래. ”
유정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메뉴 보냈으니까 올 때 장 봐서 와. ”
하영은 웃으며 대꾸했다.
“ 알았어, 갈게. ”
하영은 가벼운 표정이었지만 유정의 말 때문에 속이 심란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계속 아랫배를 쳐다봤다. 최성운과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확인했었기에 임신할 리가 없었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으로 진짜 임신이라도 한 거라면?
생각할수록 조마조마해져 그녀는 인터넷에서 미리 예약해놓고 바로 산부인과로 향했지만 그녀 앞에 줄이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하영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고 새로 나온 프로그램의 대본을 보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예능 프로그램 진행자들 중에서도 하영이 가장 잘나갔고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두 개도 모든 예능 중에서도 시청률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렇기에 방송국에서는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겠다는 마음으로 하영에게 새로 나온 프로그램 하나를 더 맡겼다.
2주에 한 번 하는 예능으로 셀러브리티 인터뷰를 위주로 그들의 일상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를 필요도 없고 머리를 쓸 필요도 없는 데다가 출연료도 두 배는 더 되었기에 하영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하영 씨. ”
하영이 대본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향수 냄새에 핸드폰을 끄고 고개를 들어보니 갸름한 얼굴에 반듯한 눈썹의 이가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