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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굳이 다시 돌아와서 내 얼굴을 보겠다니

  • 1시간 뒤, 조 비서는 서류를 들고 회사로 돌아갔다.
  • 남자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셔츠 아래 팔은 길고 힘이 있어 일에 몰두할 때도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 서류를 다 처리하고 나서야 남자는 비로소 고개를 들었고 조 비서는 얼른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 “ 하영 씨께서 사인하셨습니다. ”
  • “ 사인할 때 어떤 표정이었나? ”
  • “ 무척… 기뻐하시던데요. ”
  • 조 비서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 “ 하영 씨께서 이걸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하신 건지 엄청 빠른 속도로 사인을 마치고는 아침에 뉴스 봤다면서 이지연 씨가 사장님께 더 잘 어울린다고 하셨습니다. ”
  • 최성운은 냉소를 흘리며 서류를 펼쳐보았고 그 안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빨간 립스틱 자국이 있는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그 립스틱 자국은 하영의 섹시하면서도 완벽한 입술 모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고 그에 최성운은 갑자기 열이 올랐다.
  • 그와 함께 있을 때 하영은 신음할 때나 응석을 부릴 때나 웃을 때나 모두 꾸며낸 것이었지만 그는 그걸 알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옆에 이렇게 오래 붙잡아 두었다. 1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조금 질렸다고 생각했는데 하영은 그 낌새를 눈치채고는 하루라도 더 일찍 자신한테 차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 조 비서는 사장님이 메모지를 든 채로 아무 말이 없자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 “ 최 대표님. 제가 하영 씨를 찾아갔을 때 대기실에 어떤 남자랑 같이 있었습니다. ”
  • 그 말에 최성운은 고개를 들어 새까만 눈동자로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 “ 누구? ”
  • “ 이번에 남우주연상을 받은 남지호였던 것 같습니다. ”
  • 조 비서는 마른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 제가 갔을 때 하영 씨께서 사장님이 밤일을 잘하신다면서 그 점이 좋다고… ”
  • 비서의 말에 최성운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고 그는 담담히 얘기했다.
  • “ 입으로는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 또 다른 남자를 찾는다는 말이지. 그다음 사람도 나쁘진 않네. ”
  • 조 비서는 마음속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하영은 얼굴도 예쁘고 사람을 잘 홀리게 생겨서 사람을 꼬시면 다 넘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조 비서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지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자신의 사장님 앞에서는 방심할 수 없었으니까.
  • “ 사장님, 저녁 일곱 시 비행기로 이제 공항에 가보셔야 합니다. ”
  • 최성운은 손에 든 메모지에 찍힌 선명한 립스틱 자국을 주시했다.
  • “ 비행기는 내일 정오로 바꾸지. ”
  • 사인을 하고 기뻐하는 하영의 모습을 생각하니 최성운은 다시 그녀를 찾아가 하영이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조 비서는 잠시 멈칫했지만 프로의식을 발휘해 침착하게 대답했다.
  • “ 알겠습니다. ”
  • 최성운은 립스틱 자국이 찍힌 메모지를 서류 위에 던져놓고는 담담하게 분부했다.
  • “ 인터넷에 떠도는 거짓 기사도 다 처리하고. 그 뉴스를 내보낸 신문사들도 다 처리해. ”
  • “ 네. ”
  • 조 비서는 그 신문사들을 위해 1분간 묵념했다. 최성운이 어떤 성격인지 뻔히 알면서 감히 이지연의 말대로 그런 기사를 내보내니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라 생각하며.
  • --
  • 하영은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일해서 힘이 빠진 상태로 보도부의 유정을 찾아갔고 유정은 연락이 와서 아빠가 찾는다며 먼저 돌아간다고 하면서 먹고 싶은 걸 말하면 내일 저녁에 해줄 거라 얘기했다. 그 연락에 하영은 기분이 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던 그녀는 차라리 바에 가서 술을 마시기로 마음먹었다.
  • 하영은 무척이나 울적한 기분이었다. 오후에 남지호와 있었던 일과 그의 역겨운 말들이 생각난 하영은 가슴이 꽉 막힌 기분에 쉼 없이 술을 들이켰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인데 그 마음을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는 없었고,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가슴은 여전히 아팠다.
  • 하영은 짙은 화장을 했어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숨길 수 없었고 또 그녀 특유의 분위기로 하영이 술에 취해 있을 때에도 남자들은 수시로 그녀에게 수작을 걸었고 하영은 그때마다 귀찮은 듯이 그들을 쳐냈다. 그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참지 못한 하영은 결국 힐을 벗어 손에 들고는 한 남자의 머리에 던졌고 걸쭉한 욕설을 내뱉고 나서야 그녀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없었다.
  • 그 뒤 하영은 술을 세 잔 정도 더 마셨고 눈앞이 어질어질해져 테이블 위에 엎드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 “ 하영 씨. 최 대표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
  • 누군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고 하영은 그의 손에 이끌려 비틀거리면서 술 주정을 부렸다.
  • “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왜 내가 가야 돼? 내가 무슨 아가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