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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너 정말 역겹다

  • 세 시쯤이 되자 프로그램이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 여섯 명의 게스트들은 전부 최근 뜨기 시작한 연예인들로 화제성도 좋았고 팬들의 환호성도 높았는데, 그중에서도 남지호가 무대에 올라섰을 때 팬들의 환호성은 지붕을 뚫을 듯이 높았다.
  • 하영은 조금 전까지 화장실에서 십 분 정도 멍하니 있으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었기에 무대에 오른 지금은 그녀는 다시 유능하고 여유로운 진행자의 모습을 되찾고 게스트들과 어울리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 구십 분간의 프로그램 녹화가 끝나고 촬영 감독이 하영을 칭찬했다.
  • “ 하영 씨 오늘 컨디션이 다른 때보다 더 좋네. 남지호 씨 팬이라고 하더니만 그분 앞에서 실수할까 봐 그런 건가? ”
  • “ 당연하죠! ”
  • 하영은 말을 하는 와중에 자신의 인이어를 빼내어 스태프에게 건넸다.
  • “ 오늘 낀 렌즈 때문에 눈이 불편해서 전 먼저 대기실로 가볼게요, 감독님. ”
  • 말을 마친 하영은 급히 무대를 떠났다. 하영이 대기실에 도착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부르려 할 때 누군가 대기실을 들어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 “ 남지호 씨, 여긴 대기실이에요. 사람들이 자주 들락날락하는 데라고요. ”
  • 하영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웃어 보였다.
  • “ 남우 주연상 받으신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전 남지호 씨가 혹여 저랑 스캔들이라도 나서 남지호 씨 회사에 미움받고 싶진 않아서요. ”
  • “ 영아, 나랑 얘기 좀 해. ”
  • 남지호는 하영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말했다.
  • “ 나 그때 너한테 설명하러 가려 했는데 회사가 나 대신에 계약하는 바람에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출국해서 영화를 찍을 수밖엔. ”
  • 하영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 “ 그때 저도 이사 가고 전화번호도 바꿨었어요. 남지호 씨도 더 볼 일 없으면 이만 나가주시죠. 저 메이크업 지워야 해서. ”
  • 그녀는 곧장 화장대로 가서 렌즈를 뺐고 눈이 한결 편안해졌다.
  • 남지호는 그녀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 그날 내가 약이 든 술을 마시고 심주리 계략에 빠져 호텔까지 갔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거야… 난 걔가 사진 찍은 것도 몰랐어. ”
  • 남지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참 뒤에야 힘겹게 입을 열었다.
  • “ 너도 알잖아, 걔 아빠가… 그때 내가 찍은 영화 개봉한 지도 얼마 안 됐어서 사진이라도 풀렸으면 정말 끝장났을 거야. ”
  • 하영은 그의 말을 진짜 못 들은 듯 몸을 일으켜 물건을 가지러 가려 했고, 하영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남지호는 순간 이성을 잃기라도 한 듯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 “ 영아. 나랑 심주리 이제 진짜 끝났어. 나 회사 바꿨고 걔네 집안에서도 더는 날 협박 못 해. ”
  • “ 놔. ”
  •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닌 뼈까지 시리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영은 남지호의 품을 벗어나려 했다.
  • “ 남지호, 이거 놓으라고. ”
  • 남지호가 꿈쩍하지 않자 하영은 굳은 얼굴로 그에 저항하다 ‘찌직’하는 소리와 함께 하영의 치마 어깨끈이 끊어지며 치마가 흘러내려 그녀의 하얀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남지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손을 놓으며 입을 달싹였다.
  • “ 미안… ”
  • 하영은 재빨리 몸을 가리고 남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휘둘러 그의 뺨을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친 건지 손이 다 얼얼했고 얼굴빛은 더욱 침울해졌다.
  • “ 남지호, 너 진짜 역겹다. ”
  • 다시 남지호를 만나니 예전 일들이 새록새록 기억나며 하영은 결국 침착함을 잃고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하영의 새까만 눈동자가 남지호를 오롯이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 “ 내가 그때 양 감독을 몇 번이나 찾아가고, 그 사람이 주는 술도 다 먹으면서 어렵게 네 오디션 기회 따낸 거야. 네가 그 영화의 남자주인공이 될 수 있게. 그런데 너는? 잘못은 네가 해놓고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지. 그 사진 몇 장이 네 앞길을 망칠까 봐! ”
  • 일 년 전, 그토록 사랑했던 남지호에게 자신의 모든 걸 바쳐 그들의 미래에 모든 걸 걸었던 하영이였다. 그리고 그의 앞날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허리 숙여가며 어렵게 기회를 쟁취해왔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했을 때 하영은 스물하나에 술도 전혀 할 줄 몰랐지만, 그를 위해서 매일같이 술자리에 참석해가면서 위에 구멍이 나도록 술을 부어 넣었다.
  • 심지어 그날 밤에도 하영은 낯선 번호가 보내온 몇 장의 사진들에 무너지지 않고 남지호가 자신에게 설명해주기를 기다리며 엄마한테서 걸려온 전화 세 통을 전부 끊었었다. 하지만 결국 남지호는 도망쳐버렸고 매니저에게 헤어지겠다는 말을 전하게 하고 자신은 외국으로 떠나고 하영은 엄마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