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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럼 우리 번개 결혼하자

  • 구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나도 네가 서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 방법이 하나 있어.”
  • 그 말에 서연의 눈이 반짝였다. 서연은 망설임 없이, 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진짜? 그럼…… 우리 번개 결혼하자!”
  • 순간 구란은 자신이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 “……번개 결혼?”
  • 구란은 서연이 서가에서 가짜 딸인 서린을 내쫓아달라고 하거나, 자신을 지켜달라고 부탁할 줄 알았다. 하지만 서연의 입에서 나온 제안은 전혀 예상 밖의 파격적인 것이었다. 서연이 침착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 “난 서가 사람들의 가족관계에 묶이기 싫어. 너랑 결혼해서 네 호적에 올라가면 난 네 가족이 되는 거잖아. 그러면 서가 사람들도 함부로 나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
  • 서연은 잘 알고 있었다. 서가의 집착과 이기심을 고려할 때, 서연이 무연고자 상태라면 그들은 강제로 서연을 가족으로 편입시키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될 폭력과 강요를 피하기 어려워진다.
  • “번개 결혼의 대가로 내가 네 다리를 고쳐줄게. 나 진짜 실력 있거든. 어제 시술받고 나서 조금이라도 감각이 돌아온 것 같지 않아?”
  • 서연은 다급하게 덧붙였지만, 구란은 여전히 다리에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사실 다리가 낫고 안 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서연이라면, 구란은 그녀가 원하는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십 년 넘게 마음속 깊이 품어온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 “정말…… 나랑 결혼하겠다고?” “네가 싫다면 억지로 하지는 않을게.”
  • 서연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남자는 이번 생에서 절대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 전생에 서연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먼저 떠났던 구란을, 이번에는 반드시 제 곁에 둘 작정이었다.
  • “……할게.”
  • 구란은 이불 속에서 손을 꽉 쥐었다. 이번만큼은 조금 이기적이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중에 서연이 후회한다면 그때 이혼해 주더라도, 지금은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
  • “잘됐다!”
  • 서연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혼인신고 서류를 꺼냈다. 원래는 서가로 옮길 때 쓰려던 서류였으나, 이제는 구란과의 결혼 서류로 용도가 바뀌었다. 구란 역시 침대 옆 서랍에서 자신의 혼인신고 서류를 꺼내 놓았다.
  • 서연은 문서에 적힌 구란의 이름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구란의 가족관계등록부에는 오직 그의 이름 석 자뿐이었다. 이 낡은 별장에 사실상 버려진 상태인 구란. 그의 몸에 남은 상처와 다리에 퍼진 독 역시 가족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 너무나 안쓰러운 남자였다. 서연은 두 권의 서류를 포개 쥐며 구란을 바라보았다.
  • “이제 우리 진짜 가족이야.”
  • 서연의 눈동자가 기대와 진심으로 반짝였다. 차갑기만 하던 구란의 세상에 서서히 온기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 꼬르륵—
  • 갑작스러운 소리가 진지한 분위기를 깼다. 서연은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등에 붙을 지경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 “나 너무 배고파…… 뭐 먹을 거 있어?”
  •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는 이미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새벽에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었다.
  • “너를 여기로 보낸 그 여자, 그래도 굶겨 죽일 생각은 없었나 보네.” “그 여자가 보낸 게 아니라 내 사람이 갖다 둔 거야.”
  • “……사람이 있어?”
  • 서연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몰락한 장애 재벌 2세라고 들었는데, 돕는 이가 있다는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 “한 명 있어. 이름은 주랑이야. 다음에 소개해줄게.”
  • 서연은 구란의 배경이 어떠하든 상관없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구란의 곁을 지킬 것이고, 반드시 그의 다리를 낫게 할 것이니까. 이번 생은 전생보다 천 배는 더 행복해질 것이라 확신했다.
  • 아침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오전 9시에 구청에서 만나 혼인신고를 하기로 약속했다. 서연은 씻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서가의 본가로 돌아갔다.
  • “서연 아가씨, 이제 오셨어요?”
  • 집 안으로 들어서자 가사도우미인 솜이 아주머니가 손을 닦으며 나왔다.
  • “조금만 늦었어도 아침 못 드실 뻔했네요.”
  • 서연은 대꾸 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얼른 준비하고 나가야 했다. 하지만 솜이 아주머니가 앞을 가로막아 섰다.
  • “아가씨, 사람이 불렀으면 인사 정도는 해야죠.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가, 예의가 참 없으시네.”
  • 아주머니는 비웃듯 눈을 굴렸다. 서연은 비스듬히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이런 상대는 초장에 제대로 응징해야 한다. 식탁 위에는 이미 식어버린 남은 음식들뿐이었다.
  • “내가 서가의 막내딸인데 지금 이런 찌꺼기를 먹으라는 거야?”
  • 솜이 아주머니는 당황한 듯 억지웃음을 지었다.
  • “그게 아니라 아가씨가 늦게 내려오셔서 그렇죠. 다음엔 일찍 오시면……”
  • “서가 형편이 많이 안 좋아졌나 봐?”
  • 서연은 감탄하듯 말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막내딸 아침 식사가 이 모양이라고 기사 나면 참 보기 좋겠다, 그치?”
  • “잠깐만요!”
  • 솜이 아주머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서가가 기울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자신의 일자리도 위험해진다는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 “바, 바로 다시 해드릴게요!”
  • 서연은 차갑게 비웃음을 흘렸다. 사람 하나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하는 메뉴를 읊어준 서연은 방으로 올라가 샤워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