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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구란의 담장을 넘다

  • 구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자, 서연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서연은 곧바로 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갔다. 예상대로 거실에는 서린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서연을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맞은편 저택의 현관 조명은 불안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서연이 초인종을 눌렀지만 한참이 지나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서연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 서연은 잠시 높은 담장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한의사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산을 타며 약초를 캐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정도 높이라면 서연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서연은 망설임 없이 담장을 넘었다.
  • 저택 안쪽은 입구보다 훨씬 더 황량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어둠 속에서 짐승이 스치는 기척까지 느껴졌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버려진 폐가에 가까운 풍경에 서연은 의아함을 느꼈다.
  • ‘대체 왜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는 거야…….’
  • 서연은 영혼 깊숙이 새겨진 기억을 따라 곧장 2층으로 향했다. 구란이 머물던 방 앞에 도착하자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희미한 벽등 하나만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구란이 힘없이 누워 있었다. 숨결은 가늘었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이마에 감긴 거즈는 땀과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역시, 일이 터졌구나.’
  • 가까이 다가가자 구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서연이 구란의 이마에 손을 대는 순간, 타오르는 듯한 뜨거움에 놀라 움찔했다. 이불을 걷어내자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오른손과 이마뿐만 아니라 드러난 가슴 위에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아직 선혈이 맺힌 찰과상부터 시퍼렇게 멍든 타박상까지 처참한 몰골이었다.
  • 그때 구란이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구란은 서연을 인식하고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 “……너냐?” “말은 하네. 죽지는 않았나 봐.”
  • 서연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 상태라면 당장 병원 응급실에 있어야 정상이었다. 구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읊조렸다.
  • “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래. 나가.” “……뭐?”
  • 서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전생의 기억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는지 혼란스러웠다. 혹시 아직은 구란이 서연을 좋아하기 전의 시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짧은 허탈감이 스쳤지만 서연은 금세 정신을 다잡았다. 구란이 나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전생의 빚을 갚아야 했으니까.
  • “상처가 곪기 시작했어. 당장 치료 안 하면 열이 더 오를 거야.”
  • 구란이 반항하려 하자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란의 허리를 짚었다.
  • “허리 좀 들어봐. 바지 내려야 하니까.”
  • 구란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검은 눈동자가 서연을 뚫어지게 노려보자 서연은 곧바로 이유를 덧붙였다.
  • “하반신 상태를 확인하려는 거야.” “아래는 안 다쳤어.” “그럼 휠체어는 왜 타고 다니는데?”
  •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연은 강제로 구란의 바지를 내렸다. 그 순간 구란은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상체는 선이 살아 있는 탄탄한 몸이었지만, 하체는 지나치게 말라 생기가 없었다. 힘을 잃은 두 다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 “원래 다리가 안 좋았던 거야?”
  • 서연은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구란의 다리 곳곳을 짚어보며 상태를 살폈다.
  • “그만……!”
  • 구란이 저항하려 했지만, 고열과 통증 때문에 손끝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서연은 멈추지 않고 꼼꼼히 살피다가 손길이 사타구니 근처에 닿았을 때서야 멈췄다.
  • “큰 부상은 아닌데 왜 바로 치료 안 했어?”
  • 구란은 숨이 가빠졌고, 수치심 때문인지 포기한 것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 눈을 질끈 감는 모습에 서연은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 전생에 서연이 구란에게 모든 것을 보였을 때도 구란은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지 않았었다.
  • “말 안 하면 계속 확인할 거야.”
  • 서연의 손이 다시 움직이려 하자 구란이 급히 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 “……약에 독을 탔어. 그래서 다리가 낫지 않아.”
  • 서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약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구란과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 “지금 당장은 회복하기 힘들어. 일단 열부터 내리고 상처 소독부터 할게.”
  • 서연은 눈에 띄는 곳에서 구급 상자를 찾아 해열제를 먹이고, 이마의 거즈를 풀어 상처를 정리했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봉합 자국 위로 피와 땀이 엉겨 심하게 부어오른 상태였다.
  • “좀 참아. 다시 약 바를 거니까.”
  • 서연이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지만, 구란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