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자, 서연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서연은 곧바로 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갔다. 예상대로 거실에는 서린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서연을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맞은편 저택의 현관 조명은 불안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서연이 초인종을 눌렀지만 한참이 지나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서연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서연은 잠시 높은 담장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한의사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산을 타며 약초를 캐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정도 높이라면 서연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서연은 망설임 없이 담장을 넘었다.
저택 안쪽은 입구보다 훨씬 더 황량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어둠 속에서 짐승이 스치는 기척까지 느껴졌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버려진 폐가에 가까운 풍경에 서연은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왜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는 거야…….’
서연은 영혼 깊숙이 새겨진 기억을 따라 곧장 2층으로 향했다. 구란이 머물던 방 앞에 도착하자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희미한 벽등 하나만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구란이 힘없이 누워 있었다. 숨결은 가늘었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이마에 감긴 거즈는 땀과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일이 터졌구나.’
가까이 다가가자 구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서연이 구란의 이마에 손을 대는 순간, 타오르는 듯한 뜨거움에 놀라 움찔했다. 이불을 걷어내자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오른손과 이마뿐만 아니라 드러난 가슴 위에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아직 선혈이 맺힌 찰과상부터 시퍼렇게 멍든 타박상까지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때 구란이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구란은 서연을 인식하고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너냐?” “말은 하네. 죽지는 않았나 봐.”
서연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 상태라면 당장 병원 응급실에 있어야 정상이었다. 구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읊조렸다.
“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래. 나가.” “……뭐?”
서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전생의 기억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는지 혼란스러웠다. 혹시 아직은 구란이 서연을 좋아하기 전의 시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허탈감이 스쳤지만 서연은 금세 정신을 다잡았다. 구란이 나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전생의 빚을 갚아야 했으니까.
“상처가 곪기 시작했어. 당장 치료 안 하면 열이 더 오를 거야.”
구란이 반항하려 하자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란의 허리를 짚었다.
“허리 좀 들어봐. 바지 내려야 하니까.”
구란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검은 눈동자가 서연을 뚫어지게 노려보자 서연은 곧바로 이유를 덧붙였다.
“하반신 상태를 확인하려는 거야.” “아래는 안 다쳤어.” “그럼 휠체어는 왜 타고 다니는데?”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연은 강제로 구란의 바지를 내렸다. 그 순간 구란은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상체는 선이 살아 있는 탄탄한 몸이었지만, 하체는 지나치게 말라 생기가 없었다. 힘을 잃은 두 다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원래 다리가 안 좋았던 거야?”
서연은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구란의 다리 곳곳을 짚어보며 상태를 살폈다.
“그만……!”
구란이 저항하려 했지만, 고열과 통증 때문에 손끝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서연은 멈추지 않고 꼼꼼히 살피다가 손길이 사타구니 근처에 닿았을 때서야 멈췄다.
“큰 부상은 아닌데 왜 바로 치료 안 했어?”
구란은 숨이 가빠졌고, 수치심 때문인지 포기한 것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 눈을 질끈 감는 모습에 서연은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 전생에 서연이 구란에게 모든 것을 보였을 때도 구란은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지 않았었다.
“말 안 하면 계속 확인할 거야.”
서연의 손이 다시 움직이려 하자 구란이 급히 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약에 독을 탔어. 그래서 다리가 낫지 않아.”
서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약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구란과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은 회복하기 힘들어. 일단 열부터 내리고 상처 소독부터 할게.”
서연은 눈에 띄는 곳에서 구급 상자를 찾아 해열제를 먹이고, 이마의 거즈를 풀어 상처를 정리했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봉합 자국 위로 피와 땀이 엉겨 심하게 부어오른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