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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창백한 별장, 사라진 그림자

  • "오빠도 현장에 있었잖아요."
  • 서린이 억울하다는 듯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 "부모님께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드려주세요. 부모님이랑 오빠들이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입에 담지도 못할 말을 하겠어요?"
  • 서재우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울먹이는 서린과,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로 일관하는 서연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서재우는 서린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만 목격했을 뿐, 그 직전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 서연은 서재우의 그 맹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전생에 자신이 억울하게 몰렸을 때 서린이 느꼈을 그 비열한 승리감을, 이번에는 서린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었다.
  • "서린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습니다."
  • 서재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정 지었다.
  • "분명 너는 서린이가 그동안 받아온 사랑이 질투 나서, 수년간 서가의 귀한 막내딸 자리를 대신 차지했던 서린을 미워해 해치려 한 거야."
  • 결국 서재우는 거짓을 선택했다. 착한 동생인 서린은 절대 가족을 모함하지 않을 것이라 맹신했고, 악한 쪽은 오직 서연뿐이라고 단정했다.
  •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 서연은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 당당한 태도에 서 회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서 회장은 이렇게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딸은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연의 외모는 이용 가치가 충분할 만큼 뛰어났다. 다섯째 서재성에게 신장을 이식한 뒤, 서연을 적당한 가문에 정략결혼시켜 집안에 이익을 가져오게 하면 그만이었다.
  • 부유한 서가에 부족한 것은 없었다. 다만 통제 가능한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다. 계산을 끝낸 서 회장이 엄중하게 결론을 내렸다.
  • "됐다. 오해가 있었겠지. 우리는 서린이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믿는다. 서연, 네가 서린을 밀친 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생긴 실수라 생각하고 이번만 넘어가 주마. 오늘 일은 다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마라."
  • 서 회장은 짐짓 너그러운 척 덧붙였다.
  • "재성이에게 신장이 필요하긴 하지만, 우리 집안이 친딸의 장기를 강제로 뺏을 만큼 궁핍하지는 않다."
  • 서연이 그 위선을 비웃으며 대꾸했다.
  • "그래야겠죠. 안 그러면 당신들 정말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니까요." "너……!"
  • 임 여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말이 어쩜 그렇게 독하고 사납니! 왜 서린처럼 순하고 얌전하게 굴지 못해?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들쑤셔 놓다니, 정말 무례하구나!"
  • 서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 "앞으로 더 익숙해지셔야 할 거예요. 저 무례하고, 품위 없고, 도덕도 없거든요. 앞으로 화나실 일이 아주 많을 겁니다."
  • 또다시 험악한 말다툼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자, 서 회장이 손을 내저으며 제지했다.
  • "그만해라. 너도 피곤할 테니 집사를 따라 방으로 가서 쉬도록 해."
  • 가장의 서슬 퍼런 명령에 임 여사와 서재우는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서연은 집사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전생의 원한은 천천히, 하나씩 갚아나갈 생각이었다.
  • 전생과 마찬가지로 서연은 복도 끝에 위치한 가장 작고 외진 방으로 안내받았다. 하지만 서연은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이 방에서는 맞은편 구란의 별장이 아주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 구란이라는 남자가 궁금했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것도 산더미 같았다. 서연은 한참 동안 창가에 서서 별장을 응시했지만, 맞은편 창가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두꺼운 커튼 너머로 희미한 불빛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 이제 겨우 밤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기억 속의 구란은 이렇게 일찍 잠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 적막에 싸인 창백한 별장을 바라보며, 서연의 눈동자에 깊은 의문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