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2화 죽음보다 차가운 진실

  • 서린은 눈을 크게 뜨며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네? 언니가…… 죽었다고요?"
  • 서재우가 의구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서린을 쏘아보며 물었다.
  • "이 약에 손을 댄 사람은 너밖에 없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오빠, 설마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 서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서린은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언니가…… 결혼하기 싫어서 스스로 독을 마신 거 아닐까요? 언니는 약초에 대해서도 잘 알잖아요."
  • 서재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서연은 1년 넘게 이 창고에 감금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몸수색을 당하며 옷 한 벌조차 마음대로 숨길 수 없었던 서연이 독을 구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범인은 분명 눈앞에서 울고 있는 서린이었다.
  • 하지만 서재우는 차마 서린을 내칠 수 없었다. 그는 서린의 눈물을 닦아주며 스스로를 세뇌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 "……그래, 괜찮아. 오빠는 너를 믿는다. 우리가 미처 막지 못해서 서연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야. 부모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리자."
  • 결정을 내린 서재우의 목소리는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 "서연 같은 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시집가서 서가 망신시킬 일도 없을 테니까. 서린아, 가서 씻고 옷 갈아입어라. 흔적 남기지 말고."
  • 서린이 서둘러 창고를 빠져나가자, 서재우는 약 그릇에 남은 지문을 닦아내며 주변을 정리했다. 서재우는 죽은 서연을 내려다보며 짧게 읊조렸다.
  • "서연,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서린이를 지켜야만 해."
  • 그 광경을 허공에서 지켜보던 서연의 영혼이 차갑게 조소했다. 가짜 동생이 진짜 언니를 죽이고, 친오빠라는 자는 그 가짜를 지키기 위해 범죄의 증거를 지운다. 이 추악한 광경의 어디에 '가족'이 있단 말인가.
  • 서연은 분노로 진동하는 영혼을 이끌고 서재우에게 달려들었다.
  • "죽어! 내 손으로 죽여줄게!"
  • 서연이 비명을 지르며 서재우의 목을 할퀴려 했지만, 영혼의 손은 그의 몸을 허무하게 통과해버릴 뿐이었다. 복수조차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서연을 짓눌렀다.
  • 그때였다.
  • 쿵, 쿵—! 정적을 깨는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새까만 예복을 입은 남자가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숨이 끊긴 서연의 시신을 확인한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 그는 서가 맞은편 저택에 살던 대재벌 상속자, 구란이었다. 1년 전 실종되었다고 알려졌던 구란이, 다리가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서연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온 것이다.
  • 서연의 영혼은 놀라 구란에게 다가갔지만, 역시나 그의 몸을 통과해버렸다. 구란은 넋이 나간 얼굴로 서연의 시신을 품에 안았다.
  • "연연……."
  • 구란은 떨리는 손으로 서연의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며 애끓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살아 있어줘. 제발……."
  • 구란의 비통한 모습에도 서재우는 냉담하게 반응했다.
  • "서연이 죽었으니, 혼사는 없던 걸로 하죠."
  • 서연의 새 신랑이 될 예정이었던 구란이 고개를 들었다. 구란의 눈동자 속에는 검은 파도가 미친 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 "……어떻게 죽었지?" "원래 정신이 좀 이상한 애였습니다. 자살한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
  • 이때 단장을 마치고 돌아온 서린이 서재우의 말을 가로챘다.
  • "오빠, 언니는 원래 구 대표님을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결혼하기 싫어서 스스로 독을 마신 거예요."
  • 구란의 차가운 시선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귀국하기 전, 구란은 이미 지난 1년 동안 서연이 이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낱낱이 조사해 둔 상태였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저 가증스러운 남매의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 구란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서연을 안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서린이 다급하게 구란의 앞을 가로막았다.
  • "오빠…… 저, 사실 예전부터 오빠 좋아했어요. 서연 언니보다 제가 천 배, 만 배는 더 잘할 수 있어요. 제발 한 번만 저를 봐주시면 안 돼요?"
  • 서린이 눈물을 글썽이며 애처롭게 매달렸지만, 구란의 반응은 냉정했다. 구란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발을 들어 올렸다.
  • 퍽—!
  • "너 같은 게 감히 연연과 스스로를 비교해?"
  • 구란의 거친 발길질에 서린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며 핏덩이를 울컥 쏟아냈다. 서재우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려 했지만, 구란의 서늘한 기운과 압도적인 배경을 떠올리며 멈칫했다.
  • 구란은 서연을 품에 안은 채 길을 건너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전생의 서연은 저 저택 2층 통유리 앞에 앉아 서가 쪽을 바라보던 쓸쓸한 분위기의 구란을 자주 목격하곤 했었다. 매일같이 시선이 교차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 '대체 누구지……?'
  • 서연의 혼은 구란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관찰했다. 구란은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듯 서연을 욕조에 눕히고 얼굴에 묻은 피를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이윽고 구란이 서연의 옷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영혼 상태의 서연이 비명을 질렀다.
  • '야, 미쳤어?! 나 이미 죽었거든? 왜 남의 몸에 손을 대!'
  • 물론 구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옷을 전부 벗겨낸 구란은 말라비틀어지고 상처투성이가 된 서연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혐오나 경멸 대신, 넘칠 듯한 고통과 미칠 듯한 연민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