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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동의 안해

  • “임 아가씨, 타시죠.”
  • 그 남자의 말은 사색에 잠긴 나를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하였다.
  • 허리를 굽혀 뒷좌석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매니저가 다급하게 달려오더니 나한테 당부했다.
  • “임안 씨, 아무런 걱정 하지 말고 다녀와, 월급은 그대로 지급할 테니 출근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돼.”
  • 매니저는 내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썼고 이런 행동은 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긴 평소에는 절대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아마도 그는 내가 모진풍과 가까운 관계인 줄 알고 나한테 미움을 사면 자기한테 불리해질 가봐 잘 보이려고 이러는 듯싶었다.
  • 운전하는 남자는 서른 살쯤 되는 훈남이었다, 키도 크고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는 줄곧 백미러로 나를 주시하더니 말을 건넸다.
  • “장헌용입니다, 넷째 형 밑에서 일을 하는 동생이에요.”
  • “안녕하세요, 혹시 넷째 형이라고 하시는 분이 모진풍 씨인가요?”
  • 나는 예전부터 궁금했던 얘기를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 그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설마 모르시는 거예요?”
  • 그는 내가 당연히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내가 한창 어리둥절해하자 그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 “모 도련님은 이곳에서 엄청 유명한 사업가예요, 형제 중 넷째여서 정부나 각 계 사람들은 모두 그를 넷째 형이라고 불러요, 이렇게 이름을 직접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 나는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고 머릿속은 또다시 복잡해졌다.
  • ‘내 아들이 어떻게 모진풍의 자식 일수 있지? 나는 전에 이 사람에 대해 일면식도 없는데 어떻게 이 사람의 아이를 가질 수 있단 말이지?’
  • ‘혹시 서로 다른 넷째 형이 아닐까?’
  •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게 지금 상황이랑 더 맞을지도 모른다, 해시에는 주요인구가 몇천만 명인데 “넷째 형”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고 유군 씨가 말하는 넷째 형은 아마 모진풍이 아닐 수도 있다.
  •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혹시 진짜 넷째 형이 존재한다면 오히려 모진풍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치욕스러웠다, 나는 그와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부끄러웠다.
  • 내가 한창 터무니없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 차가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다.
  • 산이 바로 보이는 회백색의 유럽풍 호텔이 눈앞에 나타났고 나는 이 건물을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다.
  • 이 호텔은 미국 대통령이 근무할 것 같아서 사람들이 “해성 백악관” 이라고도 불렀다.
  • 하지만 이 건물 소유주에 대해서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었고 다만 해성에 사는 엄청난 부잣집 소유라고만 알고 있었다.
  • 백악관 앞 축구장 만한 잔디밭이 있었고 대문은 꽃으로 둘러쌌다, 그리고 중앙에는 하얀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임시로 설치한 무대 배경의 대형 스크린에는 익숙한 결혼 홍보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 내가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모진풍의 결혼식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늘이 바로 모진풍의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 ‘그는 결혼식에 왜 나를 부르는 것일 가?’
  • 장헌용은 나를 맨 뒷자리에 안내하면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다.
  • 나는 몇 분 동안 멍하니 앉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마음이 점차 불안해지더니 이곳을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모진풍을 만나지 못했고 그한테 아이에 대해 도움을 청할 일이 남아있었다.
  • 화려한 옷차림을 한 하객들이 연이어 예식장에 도착했다.
  • 하지만 나는 백화점 작업복 차림에 머리는 기름졌고 피부가 칙칙해서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나는 온종일 안절부절못했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자리는 현재 내 모습이랑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그런데 곧바로 정장 차림의 남자 두 명이 나한테 다가오더니 넷째 형의 부탁을 받고 나를 지키러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나를 돌볼 의무가 있으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공손하게 말했다.
  • 나는 무슨 얘기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지키러” 온다는 얘기는 사실 나를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뜻이었다.
  • 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 ‘모진풍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 내가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고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모진풍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 악기가 울려 퍼지고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신부는 행복한 표정으로 하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 이번 결혼식의 사회를 맡은 사람은 해시에서도 제일 유명한 프로그램의 MC였고 주례는 더욱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해시에서 공상을 주관하는 상무 부시장이었던 것이다.
  • 결혼식은 축복과 감동 속에서 정상적으로 진행되었고 제일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다, 주례가 신부한테 물었다.
  • “서가경 씨는 모진풍 씨와 결혼해서 그의 아내가 될 것을 동의합니까?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떤 곤란이나 질병이 있든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 “네, 맹세합니다.”
  • 신부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끄덕였는데 그 모습은 부러울 만큼 행복해 보였다.
  • 주례사가 똑같은 질문을 신랑한테 했다, 모든 사람들이 신랑도 당연히 같은 대답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신랑은 의외로 묵묵부답이었다.
  • 예식장은 삽 시에 고요해졌고 모든 이목이 신랑한테 집중되었다. 하지만 신랑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러고는 신부를 바라보는 눈빛을 점차 하객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 내 심장은 쿵쾅거렸다, 그의 눈빛이 점차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결혼식장은 순간 웅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