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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또 속았어

  • 그의 훤칠한 키는 나보다 훨씬 높았고 그를 쳐다보려면 나는 고개를 약간 젖혀야 했다.
  • 방금까지 아이와 웃고 있을 때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또 냉랭한 모습었다.
  • “의사가 아이 큰 병 없다고 했…”
  • “오진이야.”
  •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바로 끊어버렸다. 마치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듯 이일에 대해 규정해 버렸다.
  • 그의 단호한 말투는 나를 다시 화나게 만들었다. 마치 그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강인한 태도였다.
  • “여태까지 입원해 있으면서 그 많은 검사를 했는데 계속 오진이었다고요? 병원 사람들이 그랬어요, 바로 당신이 조종한 일이라고. 왜 도대체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 나는 감정이 북받쳤지만 그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 “그냥 오진이야, 지나간 일이야, 애가 건강하니 그걸로 됐어. 우린 혼인신고 하러 가자.”
  • 나는 정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 ‘안 그래도 병원 사람들 때문에 미칠 지경인데, 이렇게 간단하게 오진이라고 말하면 끝이야? 그러면서도 나랑 결혼을 하겠다고?’
  • “모 사장님 능력 있는 사람인 거 잘 알아요, 모든 사람들을 조종해서 원하시는 시나리오 대로 연극도 펼칠 수 있겠죠. 하지만 전 그 연극에서 빠질래요. 모두 사장님이 설계해놓은 그림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저랑 아이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전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혼자 천천히 노세요.”
  • 말을 마치고 나는 장헌용의 차로 다가가 소양을 데려오려 했다.
  • 하지만 그는 나의 앞에 막아섰다.
  • “그래, 혼인신고 안 해도 좋아, 우리 가족들을 속일 사진 한 장만 찍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해성에서 제일 좋은 이중 언어 유치원 연락해놨고 내일이면 입학할 수 있어. 이미 아이에게 얘기했는데 설마 실망시키려는 건 아니지?”
  • 나는 그가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의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 그는 다짜고짜 나를 끌고 가 차에 태우고 사진관으로 향했다.
  • 사진작가는 먼저 아이에게 촬영을 해줬다. 그리고 모진풍은 가방을 그에게 보관하고 나더러 직원을 따라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 이어서 우리 세 사람은 단체 사진을 찍었고, 나와 모진풍은 함께 몇 장을 찍었다.
  • 단체 사진 속에 세 사람이 환히 웃는 모습에 나는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 ‘그동안의 거짓말 같은 건 무시하고 이대로 결혼해서 아이에게 원하는 가족을 만들어 줄까?’
  • 사진을 찍고 모진풍은 나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아이도 괜찮으니 출근하고 싶다고 했다.
  • 모진풍은 정헌용에게 나를 직장으로 데려다주고 아이를 별장으로 보내라고 했다.
  • 백화점 입구에서 나는 차에서 내렸고 소양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 출근 잘하라며 자기는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모 삼촌과 함께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
  • 나는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 호화로운 집은 모진풍의 집이지 아이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 하지만 나는 아이가 실망할까 봐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 내가 백화점에 들어서자 동료가 나를 발견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 매니저님은 작은 걸음으로 달려와 긴장하는 태도였다.
  • “왔어요? 둘러보고 어디 맘에 안 드는 점 있으면 바로 알려줘요.”
  • 그의 말투는 내가 출근하러 온 것이 아니라 마치 시찰하러 온 것 같았다.
  • 나는 매니저에게 아이 일은 이미 잘 해결됐고 오늘부터 정상 출근하러 왔다고 했다.
  • “그래요, 카운터에 설 필요 없어요, 사무실에서 우리 일을 지도해 주면 돼요.”
  • 매니저가 말했다.
  • “네? 저 영업사원인데 카운터 서지 않으면 출근해서 뭐해요? 왜 사무실에 앉아 있어요?”
  • 매니저는 더욱 긴장하더니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 “나 난처하게 하지 마, 내가 너 카운터 세우면 모 사장이 나 길가에 서라고 할지도 몰라. 옛정을 생각해서 나 좀 도와줘. 나 딸린 식구도 많은데 이대로 일자리 잃을 수 없어.”
  • 나는 그가 모진풍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진풍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지시했는지 무슨 일들을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는 이상 나도 카운터에 서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모진풍 그 모진 사람이 진짜 사람을 길거리에 내보낼지도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 ‘하지만 카운터에도 못 서게 하면 다른 일이라도 줘야 하잖아?’
  • 매니저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 “앞으로 나 도와서 매장관리해주면 돼, 아니지, 내가 너를 도와 매장관리를 해야지.”
  • 다행히 나는 이 백화점에 익숙했고 확실히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퇴근할 무렵 장헌용이 나를 데리 러왔다. 동료들의 부러운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장헌용의 아우디에 올라탄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 나는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모진풍이 나에게 준 우월감과 안전감은 확실히 존재했다. 힘들었던 지난날들에 비해 지금의 변화는 나로 하여금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필경 나도 평범한 사람이었고 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장헌용은 나를 해성 최고의 어린이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내가 들어갔을 때 모진풍은 놀이구역에서 아이와 놀고 있었다.
  •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소양은 마치 고귀한 왕자님 같았다. 아주 신나게 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두 남자의 눈썹 사이로 비슷한 면이 보였다.
  • 나의 심장은 두근 거렸고 실감 나지 않은 행복감이 스쳐 지나갔다.
  • 이때 모진풍이 나를 보고 얼굴의 웃음을 이내 거두더니 아이와 함께 다가왔다.
  • “음식은 이미 시켰어, 우리 결혼 축하하자.”
  •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 나는 의혹스럽게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마술처럼 가방에서 혼인신고증을 꺼냈다.
  • “이건 네꺼야, 잘 보관해. 혼인 신고하는데 원래 두 사람이 현장에 가야 하지만 네가 일이 바쁘니, 마침 구청에 간부도 나랑 친해서 이례적으로 내가 대신했어.”
  • 나는 받아서 열어보니 위에는 모진풍과 임안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그에게 속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