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엄밀히 말하면 모두 두 명이 드나들었는데, 한 명은 사모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김 비서님이셨습니다.”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있었네?]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시선의 끝에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비서였다.
진현은 기억력이 매우 좋았다. 처음에 사람들이 범인으로 소희를 지목했을 때, 그는 마침 외근을 나가 그때 현장에 없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무슨 생각이 난 듯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저 웃기기만 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김 비서님은 워낙에 자주 드나들잖아.”
“아마 새로와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김 비서님은 대표님께서 제일 신임하는 사람이야.”
“설마 김 비서님이 회사를 배신했다고 의심하는 거야?”
그들의 말투는 한껏 과장되어있었다. 마치 그의 말이 아주 터무늬없다는 듯이.
그 말에 진현은 갑자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현장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한편, 소희는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만약 저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표정이 참 볼만 하겠네?]
소희는 사람들이 무조건적으로 신임하는 김 비서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김 비서의 본명은 김지원이다. 그녀는 항상 높은 포니테일을 하고 있었다. 곱슬곱슬한 머리를 한올 한올 정성들여 빗은 듯한 모습에 바라보기만 해도 나른함이 물씬 풍겼다. 오피스룩 스커트로 몸매를 한껏 부각한 모습에 옅은 화장에도 피부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표정은 아주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을 탓하지는 않아. 그들이 김 비서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모두 진현의 행동에서 비롯된 거니까.]
그 말에 진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확실히 그의 탓이 맞았다.
“김 비서, 뭐 할 말 없어?”
“대표님.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비록 마음속에 켕기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래도 김 비서는 금세 침착해졌다. 그녀는 진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무실에 들어간 건 맞지만… 대표님, 설마 잊으셨습니까? 매일 밤, 저는 대표님 사무실에 가서 다음날 회의 준비를 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혼자 들어갈 때를 찾아 손을 썼던거군. 그게 더 편안하니까. 보아하니 오랫동안 준비한 것 같네? 아주 철저해. 하지만… 한참을 들어보니 이 회사 직원들은 밤에도 야근을 해야 하는 거야? 진현이 직원들을 이렇게 착취할 줄은 전혀 몰랐어. 이혼 후에 이 인간을 노동부에 확 신고나 해버릴까?]
‘한참이나 듣고 있었으면서 네 관심 포인트는 고작 그거야? 이건 네 결백을 밝히는 것과 상관이 있다고. 그리고… 우리 직원들은 초과 근무를 하면 월급의 세 배를 받아.’
진현의 생각은 소희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새려고 했지만, 그는 서둘러 마음을 가라앉혔다.
“드나든 적이 있으면 모두 조사를 받아야 해.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니야.”
그러자 김 비서는 잔뜩 억울하고 상처받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녀는 진현이 자신을 이렇게 대할 줄은 미처 몰랐다.
‘분명히 저 멍청한 여자가 다 인정했는데… 진현은 마음속으로 설마 나를 저 여자랑 동등하게 대하는 건가? 난 10년 동안 진현의 곁을 지켰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고.’
다른 비서들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진현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김 비서와 소희,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쪽은 분명히 소희같아 보였다.
‘저렇게 김 비서를 대하면 김 비서의 마음이 식어버릴까 두렵지 않은가?’
그리고 진현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사실 그들은 모두 눈치챘었다.
사실 김 비서는 줄곧 진현을 몰래 짝사랑했고, 그에게 일편단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소희와 대항할 힘이 있긴 하지만 사사건건 소희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진한 그룹을 배신할 수 있겠는가?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웃음소리가 대문 쪽에서 들려왔다.
소희는 궁금한 표정으로 대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몇 몇 사람이 기세등등하게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비서실의 비서들은 줄줄이 물러서 자리를 비켰다.
기억에 따르면 선두에 선 사람은 이사회의 강 이사였다. 조금 전 코웃음을 친 사람은 바로 그의 뒤에서 뛰쳐나왔다. 노란 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남자는 바로 강 이사의 아들인 강진우였다.
딱 봐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재벌 2세가 그저 회사로 출근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강진우는 김 비서에게 다가갔다. 그는 진현을 바라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 설마 정신이 나간 거예요? 이사회에서 분명히 저 화근과 이혼하겠다고 했으면서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 일은 아직도 계속 파헤칠 필요가 있는가요? 대표님이 대대적으로 cctv를 수사하고 감시할 가치가 있냐 말입니다. 더 웃긴 건 제가 조금 전 무슨 말을 들었는줄 아세요? 여태껏 대표님한테 충성을 표했던 김 비서를 의심하다니? 김 비서도 조사를 받게 할 건가요? 미쳤어요? 정말?”
그러자 강 이사는 강진우에게 화를 내는 척 연기를 했다.
“쓸데없는 소리. 대표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대표님은 일처리가 꼼꼼한 게 장점이야. 그리고 김 비서를 의심한다고 말 할 수도 없어. 아마 사모님께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셔서 그런 거겠지.”
그 말에 강진우는 즉시 소희를 노려보았다.
“이 와중에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려 하다니… 당신은 정말…”
강진우가 모욕적인 말을 꺼내기 전, 진현은 앞으로 나아가 차가운 얼굴로 소희 앞에 서서 막 입을 열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