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비서는 진현의 대학 동창으로서 꽤 오랜 시간동안 알고 지냈었다. 그래서 김 비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고 그녀를 매우 신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어떻게 회사를 배신하고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그때, 김 비서가 다급하게 펜을 내밀었다.
진현은 겉으로는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책임감이 아주 강해서 가족을 매우 아끼고 마음도 여린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희라는 바보 같은 여자에게 오랫동안 붙잡혀 살지 않았을 것이다.
전에도 여러 번 이혼할 뻔한 적이 있긴 했지만 소희가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매번 흐지부지됐었다. 이번에야 말로 소희가 어렵게 이혼협의서에 사인하게 되었는데 진현 쪽에 오히려 문제가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
[쯧쯧. 조급한가 보군. 아마 김 비서도 공든 탑이 무너질까 봐 두려운 거겠지.]
그 말에 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때, 진현은 기다란 손으로 검은색 사인펜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와 함께 있던 소희와 김 비서는 모두 어리둥절해했다.
진현은 차갑고 어두운 눈빛으로 가만히 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소희를 빤히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이 일, 정말 네가 한 짓이 맞아?”
진현은 항상 신중한 사람이었다. 만약 자신이 들은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을뿐만 아니라 회사에 헤아릴 수 없는 숨겨진 위험을 남길 수도 있는 것이니 반드시 진실을 검증해야 했다.
순간, 김 비서는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소희는 그녀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희는 진현의 압박감이 넘치는 시선에 조금 불안해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왜 이 와중에 저런 걸 묻는 거야? 설마 나한테 400억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가?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할 말 있으면 사인을 끝내고 할 것이지.]
그 말에 진현은 마음속으로 멈칫했다. 그는 소희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꼭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소희는 두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울분을 토해냈다.
[당연히 내가 한 짓이 아니지. 글쎄 다 눈이 멀었다니까? 분명히 내가 사무실에서 나온 다음에 김 비서도 안으로 들어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김 비서도 사무실에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아예 무시하고 있어. 어떤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었는지 물어도 보지 않고, 심지어 CCTV도 조사하지 않았어. 그냥 목격자라는 사람이 나를 지목해서 이렇게 된 거야. 이런 걸 두고 잠재의식의 사각지대라고 하는 거야.]
그 말에 진현은 깜짝 놀랐다.
‘사무실에 드나들었던 게 소희뿐만이 아니라고?’
당시엔 목격자와 물증이 전부 있었던 탓에 바로 소희를 범인이라고 확정 지었었다. 확실히 CCTV를 조사하여 재검증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현도 무의식중에 소희가 이런 짓을 할 것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만…
진현이 막 말을 꺼내려던 순간, 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까 어서 사인하세요.”
진현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다.
소희는 왜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걸까? 설마 말해도 진현이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까 봐 두려운 걸까?
이런 생각에 진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 비서가 깜짝 놀란듯한 표정으로 진현을 쳐다봤다. 진현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쓸어내렸다.
마치 자신을 심판하는 듯한 시선에 김 비서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섬뜩해졌다.
김 비서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진현은 긴 다리를 내딛고 밖으로 나갔다.
“따라와.”
소희의 옆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뭐… 뭐하는 거예요?”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소희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진현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밖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던 비서들을 향해 소리쳤다.
“11일 밤 사무실 CCTV를 가져오도록 해. 당신들 사모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니 그분께 그날 밤 도대체 누가 드나들었는지 확인시켜 줄 거야.”
바로 뒤따라 나온 김 비서는 그 소식을 듣고 안색이 돌변했다.
“대표님.”
[억울해. 내가 언제 승복하지 않았다고 그래? 내 얼굴에 승복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소희 사건 때문에 진한 그룹의 직원들은 오랫동안 불만을 품어 왔었다. 특히 비서실은 더더욱 그랬다.
CCTV를 돌려보겠다고 하는 건, 그들이 소희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들은 모두 두 눈으로 직접 봤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감히 대표 사모님을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진현의 지시하에 CCTV 녹화본은 빠르게 진현의 손에 들어왔다.
몇 배로 돌려감기를 한 상황에서도 소희의 모습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소희가 들어간 지 30분이 지나도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자, 진현은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속으로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소희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억지를 부리는지 한 번 보자고.’
한편, 김 비서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잠시 후 CCTV에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자 김 비서의 동공은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진현을 힐끔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