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은 하룻밤 자고 일어났으나 정신이 맑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그 속엔 창백한 얼굴에 두 눈이 부어오른 자신이 있었다. 서윤은 물을 떠서 자신의 얼굴에 뿌리고 얼굴에 혈색이 나타날 때까지 힘을 주어 두드렸다. 그리고 약간 멍한 얼굴을 한 채 두 손으로 세면대를 잡고 슬픔에 잠겨 자신을 바라보았다.
“서윤, 정신 차려! 지나갈 수 없는 고통은 없어!”
서윤은 마음을 추스르고 화장을 시작했다. 낙담하고 초라한 몰골이 가려질 때까지 화장하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 장시정의 전화를 보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할아버지, 무슨 일이죠?”
“오늘 오라고 한 거 안 잊었겠지!”
장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비록 나이가 들었으나 목소리는 젊은이처럼 들렸다. 이는 그가 교사로 오랫동안 학생을 가르친 연유일 것이다.
서윤은 장시정의 말을 듣고 잠시 넋을 잃었다.
“할아버지, 저... 알겠어요, 돌아갈게요, 돌아가면 되잖아요.”
서윤은 고민하듯 전화를 바라보고 한참 지나서야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 문을 나섰다.
워낙 일하러 갈 생각이었으나 요즘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니 그녀는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서윤은 근처의 슈퍼에서 물건을 사고 난 후 외할아버지 장시정의 집으로 향했다.
서윤이 J 시티를 떠난 지 1년이 되었다. 그동안 계속 밖에서 일하고 있었고 돌아온 적이 없었다. 그저 가끔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을 뿐이다.
입구에 다다른 서윤은 약간 마음이 공허했다. 그러나 집사 배 아줌마가 곧 나타나 문을 열었다.
“돌아왔군요, 아씨. 왜 들어오지 않고 계셔요. 얼른 와요.”
배 아줌마는 서윤의 손을 잡고 기분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께 오늘 손님이 찾아온다고 했어요.”
“손님이요?”
서윤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손님이죠? 외할아버지께서 오늘...”
서윤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외할아버지 장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연아, 이렇게 오랫동안 이 선생님을 찾지 않는다니, 얼마나 바빴던 거냐?”
서윤의 손엔 물건이 들려져 있었고 배 아줌마가 얼른 들어 주려 했다. 그녀가 고개를 드니 거실에 한 남자가 등을 보인 채 앉아있었다.
다만 그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져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윤이 왔어?”
장시정은 웃으며 서윤을 바라봤으나 서윤의 손에 들린 선물을 보자 안색이 대뜸 굳어지며 말했다.
“오라면 그냥 올 것이지 뭘 사들고 왔어. 이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
장시정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선물은 배 아줌마가 가져갔다.
“얼른 와, 할아버지가 너를 좀 잘 살펴보자.”
서윤은 물건을 배 아줌마께 건네주고 슬리퍼로 갈아신고 들어갔다.
“오랜만이에요, 외할아버지, 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서윤은 애교를 부리듯 장시정의 팔을 안고 이리저리 흔들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저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긴 뭘 보고 싶어.”
장시정은 서윤의 이마를 딱 때리며 말했다.
“이게 무슨 꼴이야,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장시정은 말하며 서윤의 손을 끌었다.
“승연아, 선생님이 소개해줄게. 외손녀 서윤이야, 서윤아, 이 사람은 나의 제자 박승연이야.”
서윤의 놀란 눈이 그녀의 심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죠?”
박승연은 몸을 돌려 잘생긴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서윤을 바라봤고 아주 의미심장한 말투로 인사했다.
“서윤 씨, 안녕하세요!”
장시정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는 이리저리 생각하는 듯한 눈빛으로 박승연과 서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로 아는 사이니?”
장시정의 그 눈빛을 보자 서윤은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이 들어 얼른 대답했다.
“하하, 한 번 본 사이에요. 제가 전에 좀 귀찮은 일이 있었는데 박승연 씨가 저를 도와줬어요. 그렇죠? 박승연 씨!”
서윤은 박승연을 향해 힘껏 눈짓했다. 그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박승연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담담하게 웃으며 서윤의 위협을 받아들였다.
“맞아요, 선생님. 전에 서윤 씨와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서윤 씨가 지금 이렇게 기력이 왕성한 모습을 보니 이미 그때의 고통에서 벗어난 모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