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서윤은 침대 밑에 앉아 살포시 침대에 기댄 채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하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괜찮아, 더 자도 돼. 엄마가 가서 감기약 좀 가져올게.”
연서윤은 말하면서 침대를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또다시 넘어졌다.
“엄마, 이러시면 안 돼요. 제가 하림 이모 불러올게요.”
하은이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찾고는 도하림 실장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박도겸에게 음성통화를 걸었다.
무기력한 연서윤은 하은이가 도하림에게 전화 건 줄 알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박도겸은 한밤중에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 하은에게서 걸려온 음성통화를 확인하더니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보세요.”
“잘생긴 아저씨, 우리 엄마가 열이 엄청 나요. 이리로 와주실 수 있어요?”
박도겸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알았어.”
연서윤은 오후 내내 찬물에만 있었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박도겸은 바로 옆 별장에 있던 터라 그들이 너무 가까이 지낸다는 걸 안 들키려고 일부러 십여 분 뜸 들이다가 도착했다.
방안에 들어서니 연서윤은 침대 머리맡에 주저앉아 온몸이 불덩이로 돼버렸다.
인기척 소리에 연서윤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하림이 왔어? 나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차 좀 불러줄래? 넌 그냥 집에서 하은이랑 있으면 돼. 병원에 바이러스가 많아서 따라갈 필요 없어.”
박도겸은 앞으로 걸어가 연서윤을 번쩍 안아 올렸다. 이에 그녀는 눈을 뜨고 조각 같은 그의 외모를 바라보았지만 더 말할 기력이 없어 다시 눈을 감았다.
“괜찮아요, 마스크를 끼면 돼요.”
하은이는 이미 마스크까지 찾아놨다.
박도겸은 연서윤을 데리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임에도 응급실엔 여전히 환자들로 득실댔고 병상도 꽉 찬 상태였다. 링거실엔 사람이 적었지만 시설이 워낙 열악해 긴 벤치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찰하고 피검사하고 약까지 처방받은 후에야 간호사가 그녀에게 수액을 놓아줬다. 연서윤은 여전히 축 처진 몸을 박도겸의 넓은 어깨에 기댄 채 비몽사몽한 상태로 있었다.
하은이는 주사를 꽂은 엄마의 손을 조심스럽게 받쳐주며 속상한 마음에 입을 삐죽거렸다.
“엄마 너무 불쌍해요. 잠시라도 눈 좀 붙여요 엄마. 자고 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예요.”
하은이는 말하면서 연서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얌전히 옆으로 가서 앉았다. 박도겸은 서로 쏙 빼닮은 두 모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잘생긴 아저씨, 우리 엄마 좋아하죠?”
그는 하은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까진 모르겠어... 서윤이와 알고 지낸 지 고작 며칠밖에 안 됐으니 기껏해야 호감 정도겠지.’
“그래.”
다만 그는 귀여운 아이의 눈빛을 바라보며 거짓말하고 말았다.
“그럼 사랑해요?”
하은이가 계속 물었다.
“그래.”
하은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엄마는 가끔 엄청 사나울 때가 있지만 그래도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예요. 제일 예쁘고, 제일 착하고, 아무튼 제일 좋은 사람이니까 마음 놓으세요. 앞으로 아저씨 아들도 잘해주실 테고 저도 함께 화목하게 잘 지낼 수 있어요.”
순간 박도겸은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 연서윤은 아마도 하은이가 도겸의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걸 단념시키려고 박도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은 모양인데 뜻밖에도 하은이는 이런 얘기를 내뱉었다. 박도겸은 이 아이가 마냥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우리 엄마는 요 몇 년 동안 줄곧 힘들게 지내셨어요. 저 때문에 고생도 엄청 많이 하셨고요. 엄마는 전에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시느라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고 그 바람에 위병까지 생겼어요. 게다가 허리도 안 좋아서 흐리고 비 오는 날엔 엄청 괴로워하세요. 이제 고작 23살이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옆에서 챙겨줄 사람이 너무 필요해요.”
하은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푹 떨궜다. 자신의 존재로 엄마에게 너무 큰 부담을 안겨주었기에 이젠 정말 그런 엄마를 잘 보살펴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너희 아빠는?”
“엄마가 그러는데 아빤 하늘나라에 계신댔어요.”
하은이는 머리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에 다른 아이들을 보면 늘 엄마, 아빠와 함께 있었지만 유독 하은이만은 엄마 혹은 실장 이모와 함께했다. 하여 아빠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연서윤은 아이에게 아빠가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대답했고 다른 애들보다 철이 빨리 든 하은이는 엄마의 말뜻을 대충 이해하고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우리 함께 의논해볼까? 어떻게 하면 하은이 엄마한테 프러포즈할 수 있지?”
하은은 반짝이는 두 눈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사실 엄마도 다른 여자들처럼 로맨틱한 걸 좋아해요. 케이크에 반지를 넣으면 어떨까요? 그게 아니면 보물찾기 게임을 해서 엄마더러 찾아보라고 할까요?”
하은이는 기대 어린 눈길로 박도겸을 쳐다봤다. 박도겸은 자신이 연서윤에게 절대 프러포즈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 말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아저씨가 마술 하나 해줄게.”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네? 아저씨 마술도 할 줄 알아요?”
“너 동전 있어?”
하은이는 서둘러 옷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동전 한 개를 건넸다. 박도겸은 동전을 손에 넣고 주먹을 꽉 쥔 후 다시 손을 펼쳐보았다. 신기하게도 동전이 사라졌고 하은이는 못 믿겠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저씨 분명 숨겼을 거예요!”
하은이는 말하면서 박도겸의 손과 옷소매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때 박도겸은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동전이 또다시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우와 신기해요. 어떻게 한 거예요? 저도 가르쳐줘요.”
하은이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봤다.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인지 아니면 수액이 효과를 본 것인지 연서윤이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며 서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박도겸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박도겸은 한 손으로 그녀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론 하은이와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은이는 신나서 방긋 웃었고 이를 본 서윤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사실은 괜찮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다른 건 제쳐두고 하은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이뤄주는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었으니.
연서윤은 육아에 관한 책을 꽤 많이 읽었는데 엄마는 자식에게 모든 걸 해줄 수 있어도 유독 아빠의 역할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엄마가 아무리 완벽해도 아빠의 빈자리를 대체할 순 없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하은이와 박도겸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게 했다.
그렇게 아침이 되어서야 그녀는 수액을 다 맞았고 의사가 약을 몇 가지 더 처방하며 상태가 나빠지면 계속 더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도겸은 연서윤과 하은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연서윤을 침대에 눕히고는 그도 자리를 뜨려 했다. 이제 막 방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손끝이 따뜻해져 고개를 숙여보니 하은이가 머리를 들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