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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프러포즈할 거죠?

  • 연서윤은 침대 밑에 앉아 살포시 침대에 기댄 채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하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 “괜찮아, 더 자도 돼. 엄마가 가서 감기약 좀 가져올게.”
  • 연서윤은 말하면서 침대를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또다시 넘어졌다.
  • “엄마, 이러시면 안 돼요. 제가 하림 이모 불러올게요.”
  • 하은이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찾고는 도하림 실장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박도겸에게 음성통화를 걸었다.
  • 무기력한 연서윤은 하은이가 도하림에게 전화 건 줄 알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 박도겸은 한밤중에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 하은에게서 걸려온 음성통화를 확인하더니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여보세요.”
  • “잘생긴 아저씨, 우리 엄마가 열이 엄청 나요. 이리로 와주실 수 있어요?”
  • 박도겸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 “알았어.”
  • 연서윤은 오후 내내 찬물에만 있었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박도겸은 바로 옆 별장에 있던 터라 그들이 너무 가까이 지낸다는 걸 안 들키려고 일부러 십여 분 뜸 들이다가 도착했다.
  • 방안에 들어서니 연서윤은 침대 머리맡에 주저앉아 온몸이 불덩이로 돼버렸다.
  • 인기척 소리에 연서윤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 “하림이 왔어? 나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차 좀 불러줄래? 넌 그냥 집에서 하은이랑 있으면 돼. 병원에 바이러스가 많아서 따라갈 필요 없어.”
  • 박도겸은 앞으로 걸어가 연서윤을 번쩍 안아 올렸다. 이에 그녀는 눈을 뜨고 조각 같은 그의 외모를 바라보았지만 더 말할 기력이 없어 다시 눈을 감았다.
  • “괜찮아요, 마스크를 끼면 돼요.”
  • 하은이는 이미 마스크까지 찾아놨다.
  • 박도겸은 연서윤을 데리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임에도 응급실엔 여전히 환자들로 득실댔고 병상도 꽉 찬 상태였다. 링거실엔 사람이 적었지만 시설이 워낙 열악해 긴 벤치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 진찰하고 피검사하고 약까지 처방받은 후에야 간호사가 그녀에게 수액을 놓아줬다. 연서윤은 여전히 축 처진 몸을 박도겸의 넓은 어깨에 기댄 채 비몽사몽한 상태로 있었다.
  • 하은이는 주사를 꽂은 엄마의 손을 조심스럽게 받쳐주며 속상한 마음에 입을 삐죽거렸다.
  • “엄마 너무 불쌍해요. 잠시라도 눈 좀 붙여요 엄마. 자고 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예요.”
  • 하은이는 말하면서 연서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얌전히 옆으로 가서 앉았다. 박도겸은 서로 쏙 빼닮은 두 모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잘생긴 아저씨, 우리 엄마 좋아하죠?”
  • 그는 하은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좋아하는 것까진 모르겠어... 서윤이와 알고 지낸 지 고작 며칠밖에 안 됐으니 기껏해야 호감 정도겠지.’
  • “그래.”
  • 다만 그는 귀여운 아이의 눈빛을 바라보며 거짓말하고 말았다.
  • “그럼 사랑해요?”
  • 하은이가 계속 물었다.
  • “그래.”
  • 하은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우리 엄마는 가끔 엄청 사나울 때가 있지만 그래도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예요. 제일 예쁘고, 제일 착하고, 아무튼 제일 좋은 사람이니까 마음 놓으세요. 앞으로 아저씨 아들도 잘해주실 테고 저도 함께 화목하게 잘 지낼 수 있어요.”
  • 순간 박도겸은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 연서윤은 아마도 하은이가 도겸의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걸 단념시키려고 박도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은 모양인데 뜻밖에도 하은이는 이런 얘기를 내뱉었다. 박도겸은 이 아이가 마냥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 “우리 엄마는 요 몇 년 동안 줄곧 힘들게 지내셨어요. 저 때문에 고생도 엄청 많이 하셨고요. 엄마는 전에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시느라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고 그 바람에 위병까지 생겼어요. 게다가 허리도 안 좋아서 흐리고 비 오는 날엔 엄청 괴로워하세요. 이제 고작 23살이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옆에서 챙겨줄 사람이 너무 필요해요.”
  • 하은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푹 떨궜다. 자신의 존재로 엄마에게 너무 큰 부담을 안겨주었기에 이젠 정말 그런 엄마를 잘 보살펴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너희 아빠는?”
  • “엄마가 그러는데 아빤 하늘나라에 계신댔어요.”
  • 하은이는 머리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 전에 다른 아이들을 보면 늘 엄마, 아빠와 함께 있었지만 유독 하은이만은 엄마 혹은 실장 이모와 함께했다. 하여 아빠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연서윤은 아이에게 아빠가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대답했고 다른 애들보다 철이 빨리 든 하은이는 엄마의 말뜻을 대충 이해하고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 “우리 함께 의논해볼까? 어떻게 하면 하은이 엄마한테 프러포즈할 수 있지?”
  • 하은은 반짝이는 두 눈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 “사실 엄마도 다른 여자들처럼 로맨틱한 걸 좋아해요. 케이크에 반지를 넣으면 어떨까요? 그게 아니면 보물찾기 게임을 해서 엄마더러 찾아보라고 할까요?”
  • 하은이는 기대 어린 눈길로 박도겸을 쳐다봤다. 박도겸은 자신이 연서윤에게 절대 프러포즈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 말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 “아저씨가 마술 하나 해줄게.”
  •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 “네? 아저씨 마술도 할 줄 알아요?”
  • “너 동전 있어?”
  • 하은이는 서둘러 옷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동전 한 개를 건넸다. 박도겸은 동전을 손에 넣고 주먹을 꽉 쥔 후 다시 손을 펼쳐보았다. 신기하게도 동전이 사라졌고 하은이는 못 믿겠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아저씨 분명 숨겼을 거예요!”
  • 하은이는 말하면서 박도겸의 손과 옷소매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때 박도겸은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동전이 또다시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 “우와 신기해요. 어떻게 한 거예요? 저도 가르쳐줘요.”
  • 하은이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봤다.
  •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인지 아니면 수액이 효과를 본 것인지 연서윤이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며 서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박도겸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박도겸은 한 손으로 그녀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론 하은이와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은이는 신나서 방긋 웃었고 이를 본 서윤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그녀도 사실은 괜찮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다른 건 제쳐두고 하은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이뤄주는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었으니.
  • 연서윤은 육아에 관한 책을 꽤 많이 읽었는데 엄마는 자식에게 모든 걸 해줄 수 있어도 유독 아빠의 역할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엄마가 아무리 완벽해도 아빠의 빈자리를 대체할 순 없었다.
  •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하은이와 박도겸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게 했다.
  • 그렇게 아침이 되어서야 그녀는 수액을 다 맞았고 의사가 약을 몇 가지 더 처방하며 상태가 나빠지면 계속 더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 박도겸은 연서윤과 하은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 연서윤을 침대에 눕히고는 그도 자리를 뜨려 했다. 이제 막 방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손끝이 따뜻해져 고개를 숙여보니 하은이가 머리를 들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 “잘생긴 아저씨, 내일 우리 엄마한테 프러포즈할 거죠?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