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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반지 하나 준비해

  • 하은의 진심 어린 눈길에 박도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이는 금세 환하게 웃었고 티 없이 맑은 미소는 마냥 눈부실 따름이었다. 하은이는 도겸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 “내일 아저씨네 아들도 함께 저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세요.”
  • 박도겸은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 집에 도착한 후 그는 소파에 앉아 담배에 불을 지폈지만 하은의 맑은 눈빛이 눈앞에 계속 아른거렸다. 박도겸은 한참 후 담뱃불을 끄고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
  • “반지 하나 준비해.”
  • “네? 뭐라고요? 대표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 전화기 너머로 하경원의 놀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반지 하나 준비하라고.”
  • 박도겸이 다시 한번 말했다.
  • “네, 알겠습니다. 저 실례지만 어떤 반지를 준비해놓을까요?”
  • “아무거나.”
  • 박도겸은 전화를 툭 꺼버렸다. 그는 회사로 갈 준비를 했다.
  • 그 시각 더케이 그룹 대표 사무실.
  • 연민정은 마침 사무실에 앉아 하경원이 반지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걸 엿듣고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 ‘반지? 도겸이가 반지를 준비해놓으라고 했단 말이야? 나한테 프러포즈하려는 건가?’
  • 하경원이 전화를 끊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일부러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손에 쥔 잡지를 봤다.
  • “연민정 씨, 일단 커피 마시고 계세요. 대표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 하경원은 좀 전에 연민정에게 커피 한 잔 내려주려고 했는데 마침 박도겸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도겸은 그에게 반지를 준비하라고 했고 이에 하경원은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그가 알기로 박도겸은 단 한 번도 연민정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워낙 신분이 특별했으니까.
  • 연민정은 하경원을 바라보며 씩 웃더니 계속 잡지를 읽었다.
  • 하경원은 문밖을 나설 때 그녀를 또 한 번 힐긋 쳐다봤다. 팬들에게 여신이라 불리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품위가 넘쳤는데 출신을 제외하곤 박도겸에게 꿀리는 게 전혀 없었다.
  • 박도겸에게 어울릴만한 여자는 연민정 뿐이었다. 연예계에서 놓고 봐도 연민정은 높은 인기를 한몸에 받는 22세의 대스타인 데다 얼마 전엔 골든라이언 여우주연상까지 받으며 차세대 여배우로 등극했다.
  • 연민정은 잡지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반지’뿐이었다.
  • ‘이날만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 연민정은 14살 때 처음 박도겸을 본 순간부터 이미 그에게 푹 빠졌다. 박도겸은 이젠 당연히 박씨 가문의 상속자일 테고 또한 가족을 벗어나 오직 그만의 더케이 그룹도 소유하고 있어 A국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뒤흔들 핫피플이다. 다만 이전까지 그는 전혀 이렇지 않았다.
  • 박씨 가문의 도련님은 공개석상에 얼굴을 비치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집안의 철통보호를 받고 있었다. 박도겸은 17살 때 굉장히 말썽을 부린 탓에 박 회장을 화나게 하여 병원에 입원시키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 후로 박 회장과 박도겸의 외할아버지는 마지못해 의논을 마치고 그를 아예 병영으로 보냈다.
  • 그때까지만 해도 박도겸은 사람들에게 나쁜 이미지로 남겨져 있었다. 극악무도하고 불효를 일삼는 냉혈인간이라고 맹비난을 받았었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민정이 14살 되던 그해, 학교 합창단을 따라 국제콩쿠르에 참석했는데 부득이하게 합창단에 사고가 생겼고 그들은 전부 테러리스트 집단에 제압을 당했었다. 바로 그때 박도겸이 그들을 구해주었고 그 순간부터 연민정은 그에게 홀딱 반했다. 박도겸이 박씨 가문의 도련님이란 걸 뒤늦게 안 그녀는 자신의 집안 출신으로 그를 넘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 연민정은 그에 관한 모든 걸 수집하기 시작했고 박도겸에 대한 사랑이 미친 듯이 불타올랐다.
  • 드디어 하늘이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박씨 가문으로 찾아와 박도겸의 아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박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가 되었지만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일 박도겸의 프러포즈만 기다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날이 온 것이다!
  • 박도겸은 요 몇 년간 줄곧 그녀에게 차갑게 굴었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도 나름 자상한 면이 있었다. 그녀에게 수없이 많은 비싼 액세서리를 선물해주었고 일적으로도 그녀를 많이 도와줬었다. 그렇지 않으면 연민정도 4년 사이에 여배우의 타이틀을 얻을 수 없다.
  • 여기까지 생각한 연민정은 눈가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녀는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재빨리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안돼, 며칠 전 아들의 생일 때도 우린 만나지 못했어. 무려 3개월 만에 만나는 건데 가장 예쁜 모습으로 도겸을 반겨야 해.’
  • 연민정은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화장실로 곧장 들어갔다.
  • 박도겸은 꼬박 밤을 지새웠는데 그를 보자마자 하경원이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
  • “대표님, 연민정 씨가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연민정이란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박도겸은 미간을 확 찌푸리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 하경원은 잡지만 덩그러니 놓인 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연민정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 “어디 가셨지? 좀 전까지 여기 계셨어요.”
  • “회의가 몇 시야?”
  • 박도겸이 그에게 물었다. 하경원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 “9시에 시작합니다. 아직 8분이 남았습니다.”
  • “회의실로 가.”
  • 박도겸은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 “하지만 연민정 씨가...”
  • 8분 이내로 인사를 나누긴 충분한 시간인 것 같은데 박도겸은 뭐가 이렇게 다급한 걸까? 게다가 그는 항상 회의 때마다 정각에 맞춰 들어가는데 말이다.
  • “네가 알아서 해.”
  • 말을 마친 박도겸은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하경원은 머리가 복잡했다. 프러포즈까지 준비하는 사람이 왜 아직도 차갑기만 한 걸까?
  • 박도겸이 떠나자마자 연민정이 두 눈을 반짝이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치고 발그레한 두 볼로 다시 돌아왔다.
  • “연민정 씨, 대표님께서...”
  • “왔어?”
  • “회의하러 가셨습니다.”
  • 하경원은 끝내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녀에겐 너무 잔인한 대답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인데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다니, 박도겸은 그녀에게 차갑기 그지없었다.
  • “알았어...”
  • 연민정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 “그럼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 “민정 씨, 그건 아마 곤란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은 오늘 종일 회의가 있으세요. 지금 회의도 빨라야 3시간 후에 끝나실 겁니다.”
  • 연민정의 얼굴에 실망감이 잔뜩 묻어났다.
  • “그래.”
  • “민정 씨 집으로 돌아가셔서 두 아드님을 돌보시는 건 어떨까요? 두 아드님께서 지난번 생일 때 가출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셨잖습니까. 아무 일 없어서 천만다행이지만 말입니다. 민정 씨 집으로 돌아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그래, 그럴게.”
  • 하경원은 살짝 의아했다. 본인의 아들이 가출했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왜 무덤덤한 반응뿐일까?
  • 연민정은 하경원을 바라보며 머리를 살짝 끄덕이곤 자리를 떠났다.
  • ‘괜찮아, 프러포즈를 제대로 준비하려나 보지. 잠시 만나지 않는 것도 기대감을 더 높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