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의 진심 어린 눈길에 박도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이는 금세 환하게 웃었고 티 없이 맑은 미소는 마냥 눈부실 따름이었다. 하은이는 도겸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내일 아저씨네 아들도 함께 저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세요.”
박도겸은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집에 도착한 후 그는 소파에 앉아 담배에 불을 지폈지만 하은의 맑은 눈빛이 눈앞에 계속 아른거렸다. 박도겸은 한참 후 담뱃불을 끄고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
“반지 하나 준비해.”
“네? 뭐라고요? 대표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전화기 너머로 하경원의 놀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지 하나 준비하라고.”
박도겸이 다시 한번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저 실례지만 어떤 반지를 준비해놓을까요?”
“아무거나.”
박도겸은 전화를 툭 꺼버렸다. 그는 회사로 갈 준비를 했다.
그 시각 더케이 그룹 대표 사무실.
연민정은 마침 사무실에 앉아 하경원이 반지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걸 엿듣고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반지? 도겸이가 반지를 준비해놓으라고 했단 말이야? 나한테 프러포즈하려는 건가?’
하경원이 전화를 끊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일부러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손에 쥔 잡지를 봤다.
“연민정 씨, 일단 커피 마시고 계세요. 대표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하경원은 좀 전에 연민정에게 커피 한 잔 내려주려고 했는데 마침 박도겸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도겸은 그에게 반지를 준비하라고 했고 이에 하경원은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그가 알기로 박도겸은 단 한 번도 연민정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워낙 신분이 특별했으니까.
연민정은 하경원을 바라보며 씩 웃더니 계속 잡지를 읽었다.
하경원은 문밖을 나설 때 그녀를 또 한 번 힐긋 쳐다봤다. 팬들에게 여신이라 불리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품위가 넘쳤는데 출신을 제외하곤 박도겸에게 꿀리는 게 전혀 없었다.
박도겸에게 어울릴만한 여자는 연민정 뿐이었다. 연예계에서 놓고 봐도 연민정은 높은 인기를 한몸에 받는 22세의 대스타인 데다 얼마 전엔 골든라이언 여우주연상까지 받으며 차세대 여배우로 등극했다.
연민정은 잡지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반지’뿐이었다.
‘이날만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연민정은 14살 때 처음 박도겸을 본 순간부터 이미 그에게 푹 빠졌다. 박도겸은 이젠 당연히 박씨 가문의 상속자일 테고 또한 가족을 벗어나 오직 그만의 더케이 그룹도 소유하고 있어 A국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뒤흔들 핫피플이다. 다만 이전까지 그는 전혀 이렇지 않았다.
박씨 가문의 도련님은 공개석상에 얼굴을 비치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집안의 철통보호를 받고 있었다. 박도겸은 17살 때 굉장히 말썽을 부린 탓에 박 회장을 화나게 하여 병원에 입원시키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 후로 박 회장과 박도겸의 외할아버지는 마지못해 의논을 마치고 그를 아예 병영으로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도겸은 사람들에게 나쁜 이미지로 남겨져 있었다. 극악무도하고 불효를 일삼는 냉혈인간이라고 맹비난을 받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민정이 14살 되던 그해, 학교 합창단을 따라 국제콩쿠르에 참석했는데 부득이하게 합창단에 사고가 생겼고 그들은 전부 테러리스트 집단에 제압을 당했었다. 바로 그때 박도겸이 그들을 구해주었고 그 순간부터 연민정은 그에게 홀딱 반했다. 박도겸이 박씨 가문의 도련님이란 걸 뒤늦게 안 그녀는 자신의 집안 출신으로 그를 넘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민정은 그에 관한 모든 걸 수집하기 시작했고 박도겸에 대한 사랑이 미친 듯이 불타올랐다.
드디어 하늘이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박씨 가문으로 찾아와 박도겸의 아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박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가 되었지만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일 박도겸의 프러포즈만 기다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날이 온 것이다!
박도겸은 요 몇 년간 줄곧 그녀에게 차갑게 굴었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도 나름 자상한 면이 있었다. 그녀에게 수없이 많은 비싼 액세서리를 선물해주었고 일적으로도 그녀를 많이 도와줬었다. 그렇지 않으면 연민정도 4년 사이에 여배우의 타이틀을 얻을 수 없다.
여기까지 생각한 연민정은 눈가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녀는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재빨리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돼, 며칠 전 아들의 생일 때도 우린 만나지 못했어. 무려 3개월 만에 만나는 건데 가장 예쁜 모습으로 도겸을 반겨야 해.’
연민정은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화장실로 곧장 들어갔다.
박도겸은 꼬박 밤을 지새웠는데 그를 보자마자 하경원이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
“대표님, 연민정 씨가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연민정이란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박도겸은 미간을 확 찌푸리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하경원은 잡지만 덩그러니 놓인 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연민정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디 가셨지? 좀 전까지 여기 계셨어요.”
“회의가 몇 시야?”
박도겸이 그에게 물었다. 하경원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9시에 시작합니다. 아직 8분이 남았습니다.”
“회의실로 가.”
박도겸은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하지만 연민정 씨가...”
8분 이내로 인사를 나누긴 충분한 시간인 것 같은데 박도겸은 뭐가 이렇게 다급한 걸까? 게다가 그는 항상 회의 때마다 정각에 맞춰 들어가는데 말이다.
“네가 알아서 해.”
말을 마친 박도겸은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하경원은 머리가 복잡했다. 프러포즈까지 준비하는 사람이 왜 아직도 차갑기만 한 걸까?
박도겸이 떠나자마자 연민정이 두 눈을 반짝이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치고 발그레한 두 볼로 다시 돌아왔다.
“연민정 씨, 대표님께서...”
“왔어?”
“회의하러 가셨습니다.”
하경원은 끝내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녀에겐 너무 잔인한 대답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인데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다니, 박도겸은 그녀에게 차갑기 그지없었다.
“알았어...”
연민정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민정 씨, 그건 아마 곤란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은 오늘 종일 회의가 있으세요. 지금 회의도 빨라야 3시간 후에 끝나실 겁니다.”
연민정의 얼굴에 실망감이 잔뜩 묻어났다.
“그래.”
“민정 씨 집으로 돌아가셔서 두 아드님을 돌보시는 건 어떨까요? 두 아드님께서 지난번 생일 때 가출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셨잖습니까. 아무 일 없어서 천만다행이지만 말입니다. 민정 씨 집으로 돌아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럴게.”
하경원은 살짝 의아했다. 본인의 아들이 가출했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왜 무덤덤한 반응뿐일까?
연민정은 하경원을 바라보며 머리를 살짝 끄덕이곤 자리를 떠났다.
‘괜찮아, 프러포즈를 제대로 준비하려나 보지. 잠시 만나지 않는 것도 기대감을 더 높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