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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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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커피

Last update: 2023-04-16

제1화 두 남자아이의 죽음

  • “연서윤 씨, 세쌍둥이 임신이네요. 태아는 모두 건강합니다.”
  • 연서윤의 머릿속에서 임신을 알리던 의사의 말이 여전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4D 초음파 검사 결과를 들고 있었다.
  • 임신 7개월째인 그녀는 세쌍둥이를 뱃속에 품고 있느라 행동이 굼떴다. 그녀의 부푼 배는 당장 아이를 낳게 될 산모의 배보다도 더 컸다.
  • 지난번 4D 초음파 검사지에서 세 아이를 얼굴이 흐릿하게 나왔었지만 이번엔 바라던 대로 또렷하게 나왔다.
  • ‘이 사진을 범준에게 보여줘야지, 그가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 연서윤은 조금 걷고 바로 힘에 부친 듯 숨을 헉헉 몰아쉬더니 긴 의자를 찾아 앉았다.
  • 그녀의 손에 들린 검사지엔 세 아이의 얼굴이 또렷하게 찍혀있었다.
  • “너희들, 누굴 닮았어? 아빠? 아니면 엄마?”
  • 가늘고 긴 손이 연서윤 앞에 불쑥 나타나 그녀 손에 들린 검사지를 빼앗아 갔다.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든 순간, 연민영의 고혹적이면서 사악한 얼굴과 마주치게 되었다.
  • 연민영은 엄마가 임신한 사이 아버지가 바람난 애인과 낳은 딸이었으며 그녀와 6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 배다른 여동생이었다.
  • “돌려줘!”
  • 연서윤이 힘겹게 배를 끌어안고 일어나 자신의 검사지를 가져오려 했으나 연민영은 생긋 웃으며 검사지를 흘긋 뒤로 살짝 뺐다.
  • “잡종은 역시 잡종이야. 못생겼어. 한눈에 봐도 범준 씨 애가 아니야.”
  • “그게 무슨 헛소리야?”
  • 연민영은 가소로운 듯 손가락의 힘을 풀어버렸고 검사지는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연서윤, 너 정말 네가 범준이네 가문의 자식을 낳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냥 꿈 깨! 그날 밤, 너랑 잔 건 노범준이 아니니까.”
  • 서윤의 귓가에 바싹 다가간 연민영이 속삭였다.
  • “나 사실 그날 너에게 ‘아무 남자’나 찾아 줬거든.”
  • “뭐?!”
  • 연서윤이 눈을 부릅뜨고 연민영을 바라봤다.
  • “그럴 리가 없어! 그날 밤 분명...”
  • 당황한 연서윤이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연민영은 바닥에 꿇어앉아 연서윤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 “언니, 미안해. 나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차라리 날 욕하고 때려! 내 아이만은 건드리지 말아줘!”
  • 무슨 상황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한 남자가 다가와 연서윤을 확 밀쳤다. 연서윤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다가 벽에 쿵 부딪히고 말았는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통이 몰려왔다.
  • “연서윤,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 노범준이 다급히 연민영을 부축해줬다. 걱정 가득한 눈빛과 연민영을 챙겨주는 모습이 연서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저 두 사람...’
  • “범준아, 얼른 언니에게 사과해. 내가 언니한테서 널 빼앗은 거잖아. 게다가 네 아이까지 임신하고... 정말 미안해. 이 모든 게 다 내 탓이야.”
  • 연민영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노범준이 차갑게 연서윤을 흘겨보곤 연민영을 향해 말했다.
  • “어디 아픈 곳 있어? 의사 불러줄까?”
  • 연서윤은 노범준의 부드럽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니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 임신한 7개월 동안 노범준은 따듯한 인사 한마디는커녕 그녀를 보러오는 날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 “아니, 얼른 언니한테 가봐. 언닌 달 수도 나보다 많아. 난 괜찮아.”
  • 노범준은 연민영을 부축해줬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연서윤을 향하자 눈빛이 빠르게 차가워졌다.
  • “연서윤, 네 배 속의 아이는 내 아이가 아냐. 연민영이 임신한 아이가 내 아이야.”
  • 노범준의 말투는 그의 눈빛보다 한결 싸늘했으며 연서윤을 1초라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 “뭐...? 민영이 아이가... 네...”
  • 연서윤은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으며 마치 얼음물을 머리에 뒤집어쓴 듯, 온몸에 한기가 감돌았다.
  • “나 민영이랑 사귄 지 오래됐어. 여태껏 네게 말하지 않은 건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어. 그래서 네가 임신한 뒤에도 계속 숨겼던 거야. 민영이는 내 아이를 가졌어. 난 그녀를 저버릴 수 없어. 사실 우린 진작 끝난 거야. 그러니까 이제 헤어져.”
  • 노범준이 내뱉는 차가운 말을 듣고 있으니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아 연서윤은 힘껏 벽을 짚었다.
  • 임신 7개월, 그녀는 지금 새롭게 태어날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노범준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대에 들떠 있었는데 하늘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농담을 던졌다.
  •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녀를 버렸다.
  • 엄마가 세상을 뜬 후로 노범준이 그녀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
  •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모든 것을 참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그녀를 버리고 떠나버렸다.
  • 노범준은 연서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고개를 돌려 연민영을 향해 말했다.
  • “민영아, 우리 검사하러 가자. 의사가 얘기했잖아. 너 지금 굉장히 몸 아껴야 할 때라고.”
  • “그래, 알았어.”
  • 노범준은 연민영을 부축하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연서윤은 꿈에서 깬 듯, 정신이 퍼뜩 들었다.
  • “가지 마! 제대로 설명해!”
  • 그녀는 힘겹게 커다란 배를 안고 노범준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았는데 노범준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힘껏 뿌리쳤다.
  • “아악!”
  • 연서윤의 뒤에 계단이 있었다. 그녀는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는데 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 세상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연서윤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위를 바라봤다. 그곳엔 그녀가 7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임신한 여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으며 그녀는 점차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 그렇게 그녀는 온통 암흑뿐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고통으로 온몸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 링거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가 그녀 몸으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 “깼어요?”
  • 간호사가 그녀를 흘긋 보더니 링거액이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했다.
  • “조산에 세쌍둥이라 사고 난 후 제왕 절개 수술을 했어요. 아들 둘에 딸 하나예요.”
  • 하지만 간호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눈빛엔 주저함이 스쳐 지나갔다.
  • “안타깝게도 두 남자아이는...”
  • 연서윤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 간호사는 황급하게 고개를 숙여 이미 반듯한 침대 시트를 여러 번 문지르더니 결심이 선 듯, 이어서 말했다.
  • “살아남지 못했어요. 딸아이는 인큐베이터에 있어요.”
  • 그녀는 말을 마치고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것처럼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 두 남자아이는 살아남지 못했어요. 살아남지 못했어요. 살아남지 못했어요...
  • 연서윤의 머릿속에 이 한마디만이 끊임없이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