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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책임져요

  • 4년 후.
  • 바이브 술집
  • 시끌벅적한 술집 안에서 신나는 음악 소리가 사람들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 갑자기 한 무리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 입구의 벤틀리에서 날카로운 인상의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 그의 몸에서 위압적인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는데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두고 있는 듯한 고고함이 느껴졌다.
  • 박도겸, 베일 시티에서 가장 눈부신 남자.
  • “대표님, 스파이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이 바로 이 술집입니다.”
  • 차 밖에 서 있던 비서 실장 하경원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 “비워.”
  • 남자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그의 중후한 목소리가 듣기 좋게 갈라졌다.
  • 곧이어 술집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모두 한 트럭 위로 쫓겨났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욕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감히 명령에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거스를 자가 없었으니까.
  • 얼마 지나지 않아 술집 안은 텅 비게 되었고 오직 바텐더와 웨이터만 남았다. 그들은 전부 홀의 중심에 모여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연서윤은 잔뜩 취해 있었다. 오늘은 두 아들의 기일이다.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두 아들, 그날이 그녀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하루였다.
  • 그녀는 딸을 위해 생일을 축하해줄 수 없었기에 일부러 딸의 생일을 일주일 뒤로 미루었다. 매년 이날이 오면 그녀는 무한한 슬픔에 자신이 빠지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그 슬픔으로 죽은 아들과 과거의 자신을 ‘추모’했다.
  •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뭔가 차가운 것이 허리에 닿는 것을 느끼며 연서윤이 흠칫 놀랐다.
  • 이 느낌이라면 너무 익숙했다. 이건 총이다.
  • 진짜 총.
  • 아무리 많이 마셔도 총의 촉감을 느끼자 그녀는 바로 신경이 민감해지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 “움직이지 마요!”
  • 앳된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흘러나왔다.
  • ‘아이 목소리?!’
  • 연서윤이 흘긋 내려다보니 그곳에 4살가량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굉장히 잘 생겼는데 멋진 미니 정장을 차려입었다. 이목구비는 신이 무척 열심히 빚은 것처럼 정교했고 두 눈은 검고 또렷했으며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 같았다.
  •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
  • 다만 아쉬운 건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진지한 애어른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 연서윤이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며 말했다.
  • “얘야...”
  • “움직이면 쏠 거예요!”
  • 연서윤은 허리에 닿은 총이 조금 더 살을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왜 진짜 총이 있는 걸까...’
  •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술은 거의 절반이 깬 상태였다.
  • “그래, 움직이지 않을게!”
  •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만약 이 아이가 실수로 총을 쏘게 되면 얼마나 큰 사고가 일어날까?
  • “하지만 얘야, 이 총은 장난감이 아니야. 네가 만약 실수로...”
  • “실수로 총을 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 아이는 바로 연서윤의 말을 끊어버렸다. 이 아이의 이름은 박민오였고 박도겸의 아들이었다. 박도겸의 아들이 실수로 총을 쏜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 연서윤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녀는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혹여나 오발이 나면 큰일이다. 이 아이는 너무 어리니까.
  •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을 때, 화장실 칸막이의 문이 열리며 다른 한 아이가 안에서 달려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연서윤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 ‘복사한 건가?!’
  • 칸막이 안에서 달려 나온 아이도 미니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이의 두 눈은 생기로 가득했다. 이상한 점이라면 두 아이의 이목구비가 거의 똑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아주 귀여운 인상에 포동포동한 볼살을 가지고 있어 보고 있으면 한입 깨물어주고 싶었다.
  • “형, 나 바지...”
  • 박민오의 동생 박시오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형을 바라봤다. 쉬를 하고 나서 바지를 제대로 올려 입을 수 없다니, 가여워라!
  • “어라?”
  • 박시오는 입구에 있는 연서윤을 보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곧바로 실눈을 뜨고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결국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바닥을 향한 채 넘어졌다!
  • 아이의 새하얗고 포동포동한 엉덩이가 드러났다.
  • “풋!”
  • 연서윤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깔깔 웃기 시작했고 아이는 씩씩거리며 얼른 일어나 바지를 제대로 입었다. 그리곤 작은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 “이 도련님의 몸을 봤으니 이젠 책임져야 해요!”
  • 그 말에 연서윤은 거의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 “웃지 마요! 난... 난 진지해요! 2억을 줄 테니까 내 여자 해요!”
  • 아이는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휙 돌리며 “흥!” 하고 코웃음 쳤다.
  • 연서윤은 아이의 말투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네 살배기 꼬마가 지금 뭐라는 걸까? 그의 여자가 되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까?
  • “그래, 그럼 내가 네 여자 할 테니까 날 지켜줘야 해.”
  • 연서윤은 취기에 약간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 “가만히 있어요!”
  • 등 뒤에 총을 가진 아이가 불쾌한 듯 그녀를 꾸짖었다.
  • 박시오는 그 모습에 약간 화가 난 얼굴로 형 앞으로 달려가 총을 빼앗으며 말했다.
  • “형, 숙녀에게 그런 태도는 못 써! 이런 식으로 하면 형은 영원히 짝을 찾지 못할 거야. 여자에겐 부드럽게 대해야 해.”
  • 박민오는 얼른 동생의 손에서 총을 다시 빼앗았다. 동생이 총을 쥐고 있으면 오발의 가능성이 있었다.
  • 연서윤은 복사해 붙인 듯한 두 아이를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 곁을 떠난 두 아이도 쌍둥이 아들이었다.
  • “너희 둘, 똑 닮아있네? 어디서 왔어?”
  • “우린...”
  • 박민오가 박시오를 등 뒤로 숨겼다.
  • “우릴 데리고 이곳을 떠나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쏠 거예요.”
  • 박민오가 다시 자신의 총을 높이 치켜들었다.
  • 그는 이미 아버지가 밖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겨우 도망쳐 나왔으니 절대 다시 붙잡혀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잡히면 자신이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 “휴, 형.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여자를 대할 땐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야 해. 나처럼...”
  • 박시오가 새하얀 배냇니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 “넌 좀 가만히 있어.”
  • 두 아이를 보며 연서윤은 정말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겼다.
  • 한 아이는 카리스마 넘치고 다른 한 아이는 귀여웠는데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 “밖에 있는 사람들, 너희 둘 잡으러 온 거지?”
  • 아이들의 차림새가 부잣집 도련님 같아 보였으니 그녀는 밖에 몰려든 사람들의 목적을 추리했다.
  • “그걸 어떻게...”
  • 박민오가 다시 한번 박시오를 잡아끌며 등 뒤로 숨겼다.
  •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아요! 우릴 데리고 이곳을 떠날 방법을 생각해요!”
  • 아이의 명령조에 연서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애는 애다운 면이 있어야지...’
  • 그녀는 박민오의 얼굴을 한 손에 움켜쥐고 말했다.
  • “너 이러는 거 조금도 귀엽지 않아.”
  • 박민오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 “이 여자는 취했어! 아무 쓸모 없어!”
  • “형, 내가 말해볼게. 예쁜 누나!”
  • 동생이 코를 훌쩍이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연서윤을 바라봤다.
  • “밖에 있는 저 나쁜 놈은 우리 아빠가 아녜요. 우린 그 인간 집으로 팔려 갔어요. 비록 엄청난 갑부지만 저흰 그가 싫어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누나는 얼굴도 예쁘고 귀엽고 착해 보이는데 우릴 좀 도와줘요, 네?”
  • 박민오가 동생을 의아한 눈빛으로 흘긋 봤다.
  • ‘관종이 쓸모 있을 때도 있네. 적어도 거짓말은 밥 먹듯이 술술 하고 있어.’
  • 연서윤은 술을 마신 상태라 의식이 그렇게 또렷하지 않았다. 아이의 사탕발림을 듣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 “좋아! 저 밖에 있는 나쁜 놈 말이야. 그놈 내가 너희들 대신 처리해 줄게!”
  • 연서윤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 “이곳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면 뒷문이 있어. 너희들 먼저 나가서 내 차 안에 숨어 있어. 차는 바로 문 앞에 세워져 있으니까. 내가 그 나쁜 새끼를 처리하고 나면 만나러 갈게!”
  • 형이 차 키를 받아들었다.
  • “그럼 꼭 와야 해요. 누난 내 몸을 봤으니까 나를 책임져야 해요! 발뺌하면 안 돼요!”
  • 동생은 연서윤에게 플라잉 키스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연서윤은 곧바로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걸음걸이가 약간 날아가듯 가벼운 것을 보면 그녀가 마신 술의 뒤끝이 꽤 강했다. 그녀는 심지어 똑바로 직선으로 걷기도 어려웠다. 얼른 머리를 퍽퍽 때리고 정신을 차리려는 찰나,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 “너, 너, 이 나쁜 새끼야. 거기 서!”
  • 연서윤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