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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 연서윤의 신분은 비밀이었다. 회사의 직원도 그녀를 본 사람은 극히 적었는데 오로지 회사의 고위 계층의 사람들만 그녀의 진정한 신분을 알았다.
  • 세간에서는 도성 그룹의 대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몰랐다.
  • 때문에 연서윤은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 박도겸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 “그날 밤...”
  • 연서윤이 흠칫하더니 말했다.
  • “내 지갑 훔쳐봤구나!”
  •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콩 내리쳤다. 그날 술집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에 자신이 잠든 틈을 타서 그가 지갑을 뒤졌고 명함을 봤다고 생각했다.
  •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 “알았으면 비밀로 해.”
  • 박도겸은 흥미롭다는 듯이 연서윤을 향해 말했다.
  •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어.”
  • 연서윤은 그제야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 “당신은 여자를 너무 몰라. 여자의 질투심은 이상해. 여자들이 질투를 느끼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예쁜 여자, 자신보다 몸매가 좋은 여자, 자신보다 돈이 많은 여자야. 가장 심한 질투를 느끼는 게 뭐냐면...”
  • 연서윤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자기 남자보다 잘난 남자를 소유한 여자지. 그래, 이게 바로 가장 심한 질투야. 다른 건 없어. 내가 알기로 연민영은 분명 날 욕하면서 가고 있을 거야. 별 볼 것 없는 연서윤이 어떻게 잘생기고 시크하고 돈 많은 남편을 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이야. 내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거든.”
  • 연서윤은 연민영이 씩씩대는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속 시원했다.
  • 한편, 연민영은 자신의 몸에 묻은 커피를 닦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 “별 볼 것 없는 연서윤이 어떻게 잘생기고 시크하고 돈 많은 남편을 뒀지? 걔가 나보다 잘난 게 뭔데! 어유, 속 터져!”
  • 주차장에 도착한 연민영은 그제야 가방을 웨딩 숍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발을 들어 차를 걷어찼다.
  • “악!”
  • 연민영은 아픈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숍에 도착하여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연서윤을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 하지만 그녀는 연서윤과 그 남자를 다시 발견하고는 급히 벽 뒤에 숨었다.
  • 연서윤이 박도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 “연기를 이렇게 잘 하는 줄 몰랐는데? 카리스마가 넘치더라고. 오늘 내 남편 연기해 줬으니까 당신과 아이들 데리고 놀러 가줄게. 가자!”
  • 박도겸과 연서윤은 함께 차에 탔다.
  • 연민영은 벽 뒤에 숨어서 그들의 차가 출발하는 모습을 보며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 “그럼 그렇지. 너한테 어떻게 그런 운이 따를 수 있겠어! 도성 그룹 대표라니 가당치도 않지. 못 본 새에 연기가 늘었네. 좋아,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겠어.”
  • 박도겸은 연서윤과 아이들을 데리고 오락실로 향했다. 박시오와 박민오는 처음으로 오락실이라는 곳에 왔다. 두 아이는 박도겸의 아버지의 과잉보호로 인해 거의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락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연서윤은 아이들을 데리고 신나게 놀았고 박도겸은 그저 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 돌아갈 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연서윤과 아이들은 지쳐서 차에서 잠들었다.
  • 박민오는 자고 있는 연서윤과 운전하는 박도겸을 번갈아보더니 자고 있는 박시오를 깨웠다.
  • “으음...”
  • 박시오는 흐릿하게 눈을 뜨며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 박민오가 박시오의 귓가에 다가가 말했다.
  • “예쁜 누나 더 보고 싶지 않아?”
  • 박시오는 반쯤 잠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당연히 연서윤을 계속 보고 싶었다. 아이는 연서윤이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했다. 예쁘기도 한데 함께 놀아주는 연서윤이 아이는 너무 좋았다.
  • “그럼 이렇게 해.”
  • 박민오가 조심스럽게 박시오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 이때 완전히 잠에서 깬 박시오는 박민오의 말에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으며 박민오를 향해 엄지를 내보였다.
  • 박시오는 연서윤과 함께 앉았기 때문에 연서윤의 가방이 아이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하여 박시오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지갑을 가방에서 빼냈다.
  • 그러고는 지갑을 박민오에게 건넸다.
  • 얼마 뒤, 차는 연서윤의 집인 원진 아파트에 도착했다.
  • 차가 갑자기 서자 연서윤은 잠에서 깨어 물었다.
  • “도착했어?”
  • 그녀는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 “그럼 난 갈게. 너희는 아빠 말 잘 들어.”
  • 연서윤은 말하며 박시오의 볼을 만지고 박민오의 볼 역시 만지려고 했지만 아이의 차가운 표정에 그저 머리를 쓰다듬었다.
  • “예쁜 누나, 잘 자요. 꿈에서 만나요! 보고 싶을 거예요!”
  • 박시오가 연서윤을 향해 뽀뽀를 날리며 말했다.
  • 연서윤 역시 아이에게 뽀뽀를 날렸다.
  • “나도 보고 싶을 거야! 잘 가!”
  • 연서윤은 차에서 내렸다.
  • 박도겸은 어이가 없었다.
  • ‘나는 투명인간 취급이야?’
  • 차에서 내린 연서윤은 그에게 인사는 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 박도겸은 아이들을 데리고 박도겸네 저택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박시오는 얼른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연서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런 걱정 없이 자러 들어갔다.
  • 박민오는 느긋하에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박도겸이 아이를 막았다.
  • “내놔.”
  • 박민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 “뭘요?”
  • “내가 모를 줄 알아?”
  • 박민오는 할 수 없이 연서윤의 지갑을 꺼냈고 박도겸은 지갑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차에 탔다.
  • 아빠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박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 박도겸은 지갑을 들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사실 그는 백미러를 통해 아들의 행동을 똑똑히 보았다. 원래는 모른척 하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차에서 내릴 때 생각이 바뀌었다.
  • 차를 차고에 세우고 박도겸은 지갑을 들고 연서윤의 집으로 향했다. 거의 도착했을 때 그는 집안의 불이 모두 꺼진 것을 발견했다.
  •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 햇살이 따스한 아침. 박도겸은 정갈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서려고 할 때 테이블에 있는 지갑을 발견했다.
  • 여자가 지금쯤 뭘 할지 생각하며 그는 지갑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 얼마 가지 않아 누군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 고개를 숙여보니 대략 4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 흰 얼굴에 정교한 이목구비, 크고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길고 촘촘한 눈초리, 앵두 같은 입술을 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 “아저씨, 여자친구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