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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넌 그냥 애비 없는 자식이야

  • 연민정은 케이크를 구경하는 하은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연민영은 얼른 민정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상큼하고 말랑말랑하게 생긴 아이가 연서윤의 딸이라니!
  • “연서윤처럼 짜증 나게 생겼네!”
  • 연민영은 말하면서 바로 아이에게 뛰어갔다. 연민정도 연서윤을 쏙 빼닮은 하은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은이는 박도겸과도 살짝 비슷해 보였는데 두 사람이 부녀지간이란 걸 모른 이상 아무도 그 둘을 이어놓을 수 없었다.
  • 하은이가 연서윤을 쏙 빼닮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박도겸을 더 많이 닮았더라면 뒷감당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 다만 하은이를 본 연민영은 불안감에 조금 휩싸였다. 애초에 그녀들은 이 아이가 살아남지 못할 거로 여겼었다. 태어나자마자 호흡곤란으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체중도 고작 2킬로 남짓한 데다 연서윤은 무일푼의 신세라 무조건 이 아이를 살려낼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 그런 아이가 죽지 않았을뿐더러 이렇게 생기발랄하게 지내고 있다니. 연민영은 성큼성큼 다가가 하은의 팔을 덥석 잡았고 화들짝 놀란 하은이가 소리쳤다.
  • “누구세요? 이거 놔요!”
  • 케이크 가게 직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연민영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결혼식 케이크 때문에 가게에 몇 번 방문했고 가게 직원들은 전부 그녀를 진상 고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 “연민영 씨,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 연민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직원을 째려봤다.
  • “네가 뭔 상관이야? 난 얘 이모란 말이야!”
  • “난 당신 같은 이모 없어요! 당장 이 손 놔요!”
  • 하은이는 그녀에게 잡힌 팔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이는 힘껏 아등바등했지만 고작 네 살짜리 애가 무슨 힘으로 어른에게 맞서 싸우겠는가?
  • “야 이 계집애야, 너희 엄마 연서윤 맞지?”
  • 엄마의 이름을 들은 순간 하은이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 “그걸 어떻게 알아요?”
  • “당연히 알지. 내가 네 엄마의 동생이라니까. 왜? 네 엄마가 단 한 번도 내 얘기를 한 적이 없나 보네?”
  • 하은이는 순간 활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 “이모였네요. 엄마가 워낙 꼼꼼한 성격이 아닌지라 저한테 이모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 이모 엄청 예쁘시네요, 우리 엄마보다 훨씬 예뻐요.”
  • 갑작스러운 미소에 연민영도 어쩔 바를 몰랐다. 게다가 우리 엄마보다 훨씬 예쁘다는 말에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드디어 팔을 놓아주었다.
  • “계집애, 입에 꿀 발랐어? 이런 건 다 누구한테 배운 거야?”
  • 하은이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 좀 전에 직원이 준 주스를 들고 와 그녀에게 건넸다.
  • “이모, 힘드시죠? 땀도 나고 화장도 지워지셨는데 주스라도 마셔요. 저 이거 입도 안 댔어요.”
  • 연민영은 바짝 긴장하며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화장을 수정하려고 했다. 여자에겐 이미지가 전부였으니.
  • 이때 하은이가 손에 든 주스를 그녀 얼굴에 냅다 퍼부었다.
  • 한창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고치던 연민영은 갑작스러운 주스 세례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심지어 거울 속의 초라한 제모습을 덩그러니 지켜보게 되었다.
  • 지난번엔 연서윤이 커피를 쏟아붓더니 이번엔 그녀의 딸까지 주스를 부어버렸다!
  • “꼴 좀 봐요. 우리 엄마 발가락보다도 못생겼어요!”
  • 하은이는 연민영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대문 입구로 뛰어갔다.
  • “너 이 계집애! 죽여버릴 거야!”
  • 연민영은 손거울을 내팽개치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은이는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연민정에게 부딪치고 말았다. 아이는 고개를 들고 연민정을 쳐다봤는데 좀 전의 연민영보단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 연민정은 자상하게 웃으며 몸을 쪼그렸다.
  • “꼬마야, 아빠 보고 싶지 않아?”
  • “아빠요?”
  • 하은이가 꿈에도 오매불망 그리던 아빠라니, 하늘나라로 가셨다던 그 아빠를 말하는 걸까?
  • “그래. 너 아빠 무지 보고 싶지?”
  • 이때 연민영이 불쑥 다가오며 하은이의 옷깃을 잡았다.
  • “야 이 계집애야, 감히 나한테 주스를 부어? 이걸 확 죽여버려야겠네!”
  • “언니, 그러지 마. 얘가 어릴 때부터 아빠가 없어서 그래. 얼마나 불쌍한 아이야. 자, 이리 와봐 아가야, 이모한테 와.”
  • 연민정은 언니에게 곁눈질하며 하은이를 제 쪽으로 끌어와 옷매무새를 정리해줬다.
  • 하은이는 아빠에 관하여 무척 호기심이 많았다. 비록 아빠가 이미 하늘나라에 가셨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빠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었다. 여태껏 사진 한 장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 “우리 아빠를 아세요? 아빠 사진 혹시 있어요?”
  • 하은이는 경계에 찬 눈길로 연민정을 쳐다봤다.
  •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대요...”
  • “하하, 네 엄만 당연히 아빠가 죽었다고 했겠지. 왜냐하면 넌 애초에 애비 없는 자식이니까!”
  • 연민영은 주스로 흠뻑 젖은 얼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 하은이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애비 없는 자식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 “계집애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것이지. 좋아, 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자세히 알려줄게. 넌 그냥 애비 없는 자식이야. 네 엄마가 한때 음란한 생활을 즐기며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져서 널 낳은 거야.”
  •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그만해 이 못생긴 여자야!”
  • 하은이는 있는 힘껏 발악하며 입을 쩍 벌리곤 연민영의 팔뚝을 꽉 깨물었다.
  • “악!”
  • 연민영은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 “언니도 참 아이한테 무슨 도리를 따져? 지금 애들은 말로 안 돼.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려.”
  • 연민정이 옆에서 말했다.
  • “언니 꼴 좀 봐. 주스에 흠뻑 젖었잖아. 이보다 더 초라한 신부가 어디 있겠어? 고작 아이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데 앞으로 범준 씨 집안에 들어가선 어떻게 살아남겠어?”
  • 이 말을 들은 연민영은 하은의 머리채를 확 잡고 아이의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 하은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연민정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 “지금 당장 사람 불러와서 이 아이 없애!”
  • “하하, 이제 좀 아파? 아픈 걸 알면 다음부턴 입조심 해!”
  • 연민영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연민정은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고 이에 연민영이 놀란 눈길로 연민정을 바라봤다.
  • “내 말대로 해. 나만 믿으라니까.”
  • “하지만...”
  • “하지만 뭐? 이 아이는 절대 남겨둘 수 없어.”
  • 연민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자매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
  • 하은이는 제 자리에 서서 엉엉 울었고 얼굴이 불타오를 듯이 뜨겁고 아팠다. 다만 마음속에 남은 상처가 아이를 더 괴롭게 했다.
  • 연민영의 말이 아직도 하은의 귓가에 맴돌았으니...
  • 바로 이때 머리가 산발인 남자가 안으로 뛰어오더니 하은이를 덥석 채갔다.
  • “악! 이거 놔!”
  • 그 시각 연서윤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 “엄마, 살려줘!”
  • 하은이는 목청이 찢어지도록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