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발견한 것은 바로 사라져버린 약상자였다. 하지만 그 약상자는 주먹 반개도 되지 않는 크기로 작아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그리고 왜 작아진 약상자가 이 소매 주머니 안에 있지?’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던 온시안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다급하게 그 약상자를 다시 소매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소인이 모셔다드리겠나이다.”
녹두는 그녀를 부축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소인도 마님과 같이 입궁할 수 있게 대군께 빌어보겠나이다.”
온시안은 마음이 복잡해서 녹두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따라 나갔다.
문을 하나 더 지나고 구불구불한 복도까지 건너고 나서야 정원에 이르렀다.
마차가 이미 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유문산은 마차가 아닌 검은 말을 타고 있었다.
그는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낯빛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타난 걸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떠나도록 준비하거라.”
“대군, 그럼 소인도 따라서 입궁해야 하옵니까?”
녹두는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유문산은 녹두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게 좋은 생각이구나, 나중에 대왕대비마마께서 합방을 물어보시면 네가 증인으로 나설 수도 있으니 그렇게 하거라.”
저택 대문 앞에서 같이 입궁하려고 하인 열몇 명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온시안이 낯 뜨거울지 생각지도 않고 유문산이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온시안의 얼굴은 굳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무리 낯이 뜨거워질 말이어도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녹두는 온시안을 부축하면서 마차에 올렸다. 문발을 내린 그 순간, 그녀는 유문산이 그녀를 바라보는 증오의 눈빛과 하인들이 얄밉게 비웃고 있는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는데 귓가에 또 유문산의 그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얼굴은 예쁘게 생겼던데 유문산의 미움을 어느 정도 샀길래 합방을 하기까지 약을 먹어야 하지?’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 큰 굴욕이겠다, 그러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지.’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그 사람의 기억을 잘 떠올리려고 했다.
그러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다시 눈을 떴다.
유문산이 그녀를 그렇게 증오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고집의 끝을 보여준 사람이었는데 13살에 유문산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에게 시집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누가 들으나 부러워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남을 수 있었겠는데 유문산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바로 주영운인데 그녀는 유문산을 얻으려고 일부러 유문산이 자기한테 몹쓸 짓을 했다며 그를 모함했다. 나중에 황제까지 이 일을 알게 되어 누명을 쓴 유문산은 사랑하는 사람과 인연을 끊고 온시안을 아내로 맞아야 했다.
유문산은 어려서부터 똑똑하기로 유명했고 전쟁터에서 이름까지 날렸으니 세자 후보 1순위였는데 이제는 누명을 쓰게 되어 세자로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앞날을 끊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을 끊었으니 유문산은 온시안이 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모욕하려고 했다.
‘온시안 씨,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둔다는 게 맞는 말이네요.’
말발굽 소리를 계속 들을수록 온시안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전혀 다른 세상에 와버리다니 그녀는 고통스럽기도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도 했다.
그녀는 손을 소매 안에 넣고 작아진 약상자를 만지고 나서야 마음이 살짝 든든해졌다.
바람이 세게 불어 문발사이로 계속 유문산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뒷모습은 아주 굳세고 힘이 있어 보였는데 검은 머리에 꽂힌 비녀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당분간 그 사람은 그녀의 악몽일 듯했다.
온시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상황에 계속 처해있으면 곧 다가올 미래가 죽음밖에 더 없겠지? 그러니 지금은 나약하게 굴 때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