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을 먹고 나자 기력이 조금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탁자 위로 몸을 일으켰으나 물을 부을 수는 없어 엎드린 채로 찻잔에 남은 차를 마셨다.
조금 나아진 기분이 들어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보았으나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힘이 빠져 바닥에 그대로 엎드렸다. 등의 상처가 아파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두 팔꿈치로 기어가 약 상자를 찾았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소염제와 해열제의 위치를 기억했다.
주사를 놓을 수 없기에 약을 조금 더 많이 먹을 수밖에 없었다.
30분쯤이 지나도 그녀는 비타민 보충제를 몇 알 삼켰다. 그러나 물이 없어 약의 신 맛을 그대로 느껴야만 했다.
약을 먹고 난 뒤에는 몸을 말아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여자로 태어나 이러한 고통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곤장을 맞고 난 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와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했다. 권세 있는 자들이 다른 이들의 목숨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목숨은 문산 대군의 손에 달려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생존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고름을 짜내었으나 약을 쓰지 않으면 좋지 않았다.
그 시각, 뒤뜰.
차용이는 약을 먹은 후 다시 고열에 시달렸다.
차 할멈은 이제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낮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아이가 저녁이 되니 다시 고열에 시달리니 말이었다.
녹두 역시 조급해져 말했다.
“그러지 말고 윤 의원에게 다시 가보는 게 어때요.”
차 할멈은 고열로 정신이 혼미한 채 숨만 몰아쉬는 손자를 보고 닷 냥과 약 두 알을 떠올렸다. 이제 정말 돈이 없었다. 절망스러웠다.
“소용없어. 소용이 없어.”
녹두가 거의 눈물을 흘릴 지경이 되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차용이가 죽어가는 걸 그냥 눈 뜨고...”
그녀는 차마 뒷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차 할멈이 이를 악물고 비통한 듯 말했다.
“차용이가 만약 잘못 된다면 내 이 한 목숨 걸고 그 여자를 죽일 것이다.”
그녀에겐 손자 차용이밖에 없었다. 그러니 만약 손자를 잃게 된다면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상대는 문산 부인에다 정실의 딸이었다. 만약 그녀를 해한다면 자신도 살아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차 할멈은 정말로 제 목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차용이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아이는 열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떴다. 철이 일찍 든 작은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할머니, 저 괜찮아요.”
차 할멈은 눈물을 흘리며 투막한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괜찮아, 할머니가 널 위해서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복수하마.”
차용이가 깜짝 놀라 몸을 서서히 일으키고는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마님께서는… 제 병을 치료해주셨어요. 좋은 분이에요.”
녹두가 당황해 말을 잃었다.
“차용아 열 때문에 정신이 안 드는 거니? 그게 무슨 말이니?”
차용이가 다급히 말했다.
“저를 위해 고름을 찢어주셨어요. 고름을 찢고 약을 먹으면 나을 거라고요. 마님께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괜찮을 거라고 해주셨어요.”
그렇게 말한 차용이는 침대에 꼼짝 없이 누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 할멈이 벌떡 일어나 놀란 눈으로 차용이를 보았다.
“정말이냐? 너를 해치려한 게 아니란 말이냐?”
“그러지 않았어요....”
차용이의 다치지 않은 눈이 흐릿해 보이더니 초점이 흐트러졌다.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 추워요.”
차용이는 온 몸을 떨며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했다. 그러나 숨을 내쉬기만 할뿐 들이쉬기가 어려워보였다.
“녹두야, 차용이를 보고 있어라. 내 부인을 불러와야겠다.”
차 할멈은 등불을 들고 곧바로 달려 나갔다.
차 할멈은 풍요각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등불을 비추어 땅에 엎드려 있는 온시안을 발견했다. 엉망진창인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