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스파이의 위치는 바이브 술집으로 고정되었는데 그 여자도 마침 그곳에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 박도겸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실종된 아들이 지금 그녀와 함께 있고 그녀는 마침 그의 이웃이라니.
이 모든 것이 우연치고는 이상하리만치 잘 들어맞았다.
박도겸이 속으로 이 별장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하경원이 옆에 다가와 물었다.
“대표님, 들어갈까요?”
“철수해.”
“네? 왜죠?”
‘잘못 들은 건가?’
아들의 위치를 찾아 부하들이 주위를 에워쌌는데 지금 철수하라니?
“철수해.”
박도겸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다시 한번 말했다.
그는 이것저것 설명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잘 아는 하경원도 그의 결정에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고 어쩔 수 없이 모두 철수시켰다.
박도겸은 문 앞으로 다가와 손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의 인테리어를 본 그는 약간 놀란 것 같았으나 점점 이곳이 아이를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여자... 의도가 너무 분명하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서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거실 중심까지 걸어왔을 때, 등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한기가 느껴졌다.
“어디서 온 도둑놈이야? 감히 내 집에서 도둑질할 생각을 해? 아주 미쳐 날뛰는 구나, 너?”
조금 전 주방에서 요리하던 연서윤은 주방 환풍기를 끄자마자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박도겸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을 본 연서윤은 하마터면 손에 쥔 총을 땅에 떨어트릴 뻔했다.
‘어젯밤의 그 선수?’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찰싹 때렸다.
“이봐. 지금 이러는 거 재밌어? 내가 돈도 다 줬잖아. 내 집까지 찾아오는 건 너무했다는 생각 안 들어?”
연서윤이 얼른 총을 숨겼다.
“선수면 선수답게 직업 정신을 갖고 도덕을 지켜야 하지 않아? 잠자리 끝, 돈 갖고 떠나면 끝. 서로 빚진거 없잖아. 뭐, 나한테 빌붙기라도 할 셈이야?”
그 남자를 보며 연서윤은 짜증이 몰려왔다. 술김에 실수로 한 번 잤다고 집까지 쫓아온다고? 그나마 딸 하은이가 집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박도겸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연기한다는 느낌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여자의 연기가 너무 훌륭해서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정말 다 우연인 걸까.
연서윤이 두 손을 모으고 가엾은 얼굴로 박도겸을 바라봤다.
“제발 부탁인데... 대체 얼마를 원하는 거야? 내가 다 줄게, 응? 우리 만난 적 없는 거로 해줘. 내가 나중에 돈 많은 여자 몇 명 소개해 줄게. 어때?”
그때, 박시오가 눈을 비비며 위층에서 걸어 내려왔다. 아이들은 놀다 지친데다 어젯밤에 거의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기에 위층에서 잠들었었다.
“쉬 마려워.”
연서윤이 다급하게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그녀는 박도겸의 곁을 지나갈 때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이가 집에 있으니까 말조심해.”
말을 마치고 그녀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이리 와, 내가 화장실 데려가 줄게.”
박시오가 눈을 비비며 아래층에 있는 남자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빠?”
그 말에 놀란 연서윤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젠장. 이게 무슨 상황이야?’
박시오는 자신이 환각을 본 줄 알고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래층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흉악한’ 아빠였다.
“아빠!”
조금 전,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연서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빠라고 했어. 분명히.’
연서윤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박도겸을 바라봤고 손가락으로 박도겸과 박시오를 번갈아 가리켰는데 그녀의 입술마저 가늘게 떨려왔다.
“내려와.”
박도겸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듣고 있으면 공기가 차가워질 만큼 서늘했다.
“싫어요!”
박시오가 후다닥 2층 방으로 달려서 올라가 방문을 “쾅!”닫아버렸다.
문 닫는 소리에 온 집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연서윤은 퍼뜩 놀라며 박도겸을 향해 물었다.
“너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어?”
“맞아.”
연서윤은 박도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오직 이 정도로 잘생긴 미남만이 저 둘처럼 빛나는 미모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내가 참견 한마디 해야겠어.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뭐든 할 수 있잖아. 왜 굳이 선수로 사는 건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면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그녀는 팔짱을 끼고 설교하다가 갑자기 답답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선수라면 결혼한 적이 없을 텐데? 여자친구가 있을 리도 없고. 설마...”
연서윤은 더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 본인도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했었다. 이런 일을 당한 여자는 피해자지만 남자가 피해자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연서윤이 박도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고 그런 그녀의 손을 바라보는 박도겸의 눈속에 혐오스러운 빛이 살짝 내비쳤다.
“그런 일을 당했다면 정말 안 됐어. 하지만 이미 아이를 낳았으니 부모로서 끝까지 책임져야지. 왜 부잣집에 보내서 도련님으로 만들어? 게다가 그 나쁜 새끼의 아들로 살아가게 만들다니.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이 먹고 자는 건 걱정 없겠지만 정말 행복할까? 아이가 원하는 건 함께 있어 주는 거야.”
“나쁜 새끼?”
박도겸이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위층을 바라봤다.
‘이 녀석들, 이야기를 꾸미는 재주가 있었네?’
연서윤은 턱을 살짝 어루만지더니 말했다.
“이렇게 하자. 나랑 이 아이들도 인연이 참 깊은 것 같으니까. 내가 돈을 줄게. 넌 작은 도시로 내려가 규모가 작은 장사를 하며 아이를 키워. 그 나쁜 새끼가 너희들 찾지 못하게 하고 거기서 잘 살아.”
연서윤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도겸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 없어. 그... 놈이 이미 내 아들 돌려줬으니까.”
“돌려줬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연서윤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 놈 아내가 임신했어.”
그러자 연서윤이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정말? 진짜 잘됐다. 그놈도 운이 엄청 좋네? 나이 가득 먹고 아내를 임신시킬 수 있다니. 잘됐어, 진짜 잘됐어.그럼 적어도 네가 네 아들을 희생해야 할 일은 없잖아.”
“그래서 이번에 아이들을 집에 데려가려는 거야.”
“절대 함께 가지 않을 거예요!”
위층에서 박시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예쁜 누나랑 같이 살 거예요!”
“나와!”
박도겸이 위층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는 자기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손주들을 오냐오냐하며 키워 아이들은 버릇이 없었다. 게다가 박도겸이 자주 출장 다녔기에 아이들과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조금 전 박도겸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연서윤이 말했다.
“이봐,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애들이 얼마나 놀라겠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새아빤 줄 알겠어. 됐어, 내가 할게.”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 노크했다.
“배고프지 않아? 내가 맛있는 거 만들었는데. 파인애플 넣고 지은 밥 먹어봤어? 따끈따끈한 후루츠 팬케이크도 있는데. 이따가 우리 같이 빵도 만들어 보자.어때?”
박도겸은 아래층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약간 웃겼다. 자신에겐 약간 험악한 어조로 얘기하더니 뜻밖에도 아이들과 얘기할 땐 부드럽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