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병은 흔한 병 같지만 고질병이 도졌을 때, 제때에 치료하지 못한다면 환자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강묵이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는 병사를 거느리고 전쟁을 치르는 데 능한 한편, 의술 또한 세상에서 뒤따를 자 없었다.
양가죽 가방 안에는 은침 24대와 침술법 도감도 들어 있었다.
그 침술법은 이름하여 ‘천룡 이십사시’였다.
이는 서강묵이 북정의 사막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손에 넣은 것이다.
이십사시는 하루의 윤회를 의미하는데 사람을 기사회생할 수 있게 치료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는 이 침술법으로 북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군부대의 병사들은 물론, 사막의 유목민들의 희귀 질병도 모두 치료했다.
심장병 같은 병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셈이었다.
“보스, 북정을 떠날 때, 다시는 침술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채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누구기에 우리 사령관님이 다시 침을 들도록 마음먹으신 거지?’
“장인어른이 심장병이시래! 이틀 뒤의 퇴임 파티에 소영미와 소국진 부녀를 웨이터로 써먹어!”
“네, 보스!”
주채연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서강묵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때, 뒷좌석에 앉은 소영아가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장인어른이 누구예요?”
서강묵은 바로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의 장인어른은 바로 우리 영아의 외할아버지야. 외할아버지가 지금 편찮으셔서 아빠가 치료해주려고 그래.”
“와, 아빠 짱! 외할아버지를 치료도 해주고.”
소영아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옆에 있던 소우희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서강묵 이 사람, 멀쩡하게 생겨서는 왜 자꾸 허풍을 치지? 의술을 할 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령관의 퇴임 파티에 들어갈 자격도 없는 사람이 소영미와 큰아버지를 웨이터로 부리라고? 무슨 자신감에 하는 소리야?’
십 몇 분 뒤, 그들은 동제병원에 도착했다.
원장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소우희는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유봉옥이 왕문원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소국진과 소부옥이 옆에서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냉소를 짓고 있는 소영미도 보였다.
서강묵은 미간을 찌푸렸다.
“왕문원이 왜 여기 있지?”
소우희는 유봉옥의 옆으로 걸어가 물었다.
“아줌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유봉옥은 그녀가 온 것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왕문원의 앞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이 병원이 문원이 삼촌 거래. 네 아빠 지금 위독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길 수 없어. 얼른 문원에게 잘못했다고 빌고 아빠 수술하게 해달라고 해!”
“왕문원, 우리 아빠 수술 못 받게 한 게 네 작간이야?”
소우희가 분노에 찬 얼굴로 물었다.
왕문원은 머리에 싸맨 붕대를 어루만지더니 말했다.
“우리 삼촌은 심장병 쪽에서 아주 유명한 전문의야. 하지만 지금 삼촌이 근무할 시간이 아닌데 왜 네 아빠에게 수술을 해줘야 해? 아무리 큰 일이라도 내일 다시 얘기해!”
“정말 다른 의사는 없는 거야?”
“있다고 해도 위급한 환자에게 수술을 할 수는 없지.”
왕문원이 냉소하며 말했다.
아까 서강묵에게 호되게 혼난 그는 바로 병원에 치료받으러 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영미가 전화를 걸어 소우희 때문에 소국림이 화가 나 심장병이 도졌다고 했다.
그리고 소국림은 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병원장의 친조카이기에 병원의 의사들은 모두 그를 알고 있었다.
소우희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왕문원이 아니었다.
아빠를 살리려는 마음에 소우희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왕문원에게 무릎을 꿇었다.
“왕문원,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니 사적인 감정은 내려놓고 원장님께 전화를 걸어 우리 아빠 살려달라고 해줘!”
왕문원이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와서 빌면 다야? 너 미치게 한 남자도 같이 왔잖아.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라면서 저 자식한테 빌어 봐.”
유봉옥은 그제야 소우희와 함께 온 서강묵을 보았다.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소우희, 네 아빠 죽는 꼴을 봐야겠다는 거지? 너 어떻게 저런 인간한테 빠진 거야? 눈 멀었어? 저 인간은 돈도 없고 소영미를 5년간 졸졸 쫓아다니기까지 했잖아! 서강묵, 지금 당장 꺼져! 나와 우희 아빠는 절대 널 집에 들이지 않을 거야! 문원아, 걱정하지 말게. 우희가 정신이 잠깐 나가 실수했나 봐. 애아빠가 깨어나면 내 꼭 제대로 혼낼게.”
그녀의 말을 들은 왕문원은 그제야 화가 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아줌마를 봐서라도 삼촌을 불러와야겠네요. 하지만 오늘 밤에는 우희를 데려갈 것입니다.”
“너…”
소우희는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왕문원이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옆에 있는 소우희는 입을 막고 깔깔 웃었다.
“소우희, 애가 다 컸는데 무슨 처녀인 것처럼 내숭이야. 5년 전에 정체도 모르는 남자에게 내준 몸, 오늘 아빠 살리는 셈 치고 또 한 번 내주면 안돼?”
소영미가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소우희의 심장을 찔렀다.
철썩!
서강묵은 소영미의 따귀를 갈겼다.
히죽거리며 웃던 소영미는 입안에 피 맛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우희 씨는 내 여자니까 누구도 괴롭히지 못한다고 했지! 낮에 말했는데 기억을 하지 못했으니 지금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철썩!
서강묵은 또 따귀를 쳤다.
이번에는 왕문원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감히 내 여자를 모욕해? 죽고 싶어?”
서강묵의 말은 우레가 되어 사무실 안에 울려퍼졌다.
유봉옥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이 자식이, 내가 무릎 꿇고 겨우 애원해서 성사시킨 걸 단번에 그르치려고 해? 그러면 큰일 난다고!’
소국림이 죽으면 그녀의 인생도 끝이 나게 될 것이다.
옆에 있던 소부옥은 지팡이로 서강묵을 찔러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우희 역시 떨리는 걸음으로 뒷걸음질치며 서강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남자,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거 아니야?’
서강묵은 아까 낮에도 카페에서 왕문원을 때려 다치게 했다. 그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