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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중요한 나라 물건

  • 그 순간, 분위기는 정적에 휩싸였다.
  • 서강묵은 한눈에 그가 꿈에도 그리던 여자 소영미를 알아보았다.
  • “영미 씨, 나 강묵이오. 약속대로 당신과 결혼하러 왔소!”
  • 그의 마음은 미안함 반, 책임감 반이었다. 서강묵은 소영미의 손을 덥석 잡고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 “너였어?”
  • 소영미의 얼떨떨한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 “나 지금 바쁘니까 먼저 나가 봐. 할 말이 있으면 이따 저녁에 다시 하고.”
  • “당신이 지금 이 남자와 맞선을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소! 집안사람들의 핍박에 못 이겨서 나온 거라면 내 얼마든지 당신 편을 들어주겠소!”
  • 서강묵은 곁눈질로 진호비를 힐끔 보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 “네가 뭔데 내 앞에서 잘난 척이야?”
  • 모욕감을 느낀 진호비가 짜증을 냈다.
  • “소씨 가문 사람들의 핍박이 뭐가 어쩌고 어째? 나와 영미 씨가 서로 좋아하는 것인데 왜 이래? 아, 기억이 좀 나네. 네가 그 영미 씨를 5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스토커 가난뱅이 사병이지?”
  • “스토커 가난뱅이 사병?”
  • 서강묵은 미간을 찌푸렸다.
  • 진호비는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 “그럼 아니야? 그까짓 월급카드로 영미 씨가 고무신 신고 너 제대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하면 그 까짓 월급으로 영미 씨에게 제대로 된 생일 파티도 마련해 줄 수 없으면서 결혼을 하겠다고? 꿈 깨!”
  • 서강묵은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렸다.
  • ‘내가 은행카드를 영미 씨에게 준 걸 이자가 어떻게 아는 거지?’
  • “영미 씨,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사실이오?”
  • 서강묵은 시선을 소영미에게 돌렸다.
  • 소영미는 그의 눈을 아무렇지 않게 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 “맞아! 날 핍박한 사람 없었어. 다 내가 원해서 호비 씨 만난 거야.”
  • 서강묵은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 그는 목에서 나무로 된 팬던트를 뺀 뒤, 한쪽 무릎을 꿇고 진심 어린 눈길로 말했다.
  • “영미 씨, 지난 5년 동안 고생 많이 한 거 안다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이해하오. 하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소. 이젠 내가 돌아왔으니 나와 결혼합시다. 당신에게 그동안 못해 준 것을 모두 보상하겠소!”
  • “풉!”
  • 소영미가 대답하기 전에 맞은편에 있던 진호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 “서강묵, 정신이 나갔어? 나무쪼가리 하나로 영미 씨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너 그냥 소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앉고 싶은 거 아니야?”
  • “나무쪼가리? 이건 드래곤 증표야. 너희 진씨 가문 사람들의 목숨을 다 합해도 이것보다 못하다고!”
  • 서강묵은 차가운 시선으로 진호비를 노려보았다.
  • 이 드래곤 증표는 북정의 백만 드래곤군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 그것을 가격으로 매기면 도시 하나를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 이건 아주 중요한 나라 물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이걸로 청혼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 “하하하, 영미 씨. 호구를 잡아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을 골라야지요. 지금이 어느 땐데 증표 어쩌고 이런 소리를 하다니. 사극을 많이 본 건지 정신이 나쁜 건지. 영미 씨는 어린 소녀도 아니고 이렇게 말도 안되는 말에 넘어가요?”
  • 진호비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 소영미는 창피해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괜히 화를 서강묵에게 돌렸다.
  • “서강묵, 호비 씨 말이 맞아. 난 널 호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다른 사람을 시켜서 나한테 좋아한다고 전할 때 영광스럽게 제대해서 날 빛내주겠다고 했지? 그런데 5년 동안 매달 월급이랍시고 들어오는 돈은 400만원 뿐이었어. 가방 사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으로 날 빛내주겠다고? 네가 입고 있는 싸구려 군복 좀 봐. 그리고 나무쪼가리도 허접하기 짝이 없지! 프로포즈하는 반지도 사지 못했으면서 영광스럽게 제대한다고? 유명해지겠다고?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 “영미 씨, 나…”
  • 서강묵은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지만 5년간 마음에 품고 있었던 여자가 이런 말을 하자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나는 무슨! 군에서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어디 한 번 말해 봐. 장교 급이라도 돼? 퇴직금이 억에 달하는 거 아니면 입도 벙긋하지 마!”
  • 소영미는 서강묵에게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았다.
  • 서강묵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그의 눈에는 장교도, 일 억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 그런데 이렇게 속물적인 소영미는 그가 상상하던 여자와 너무나 달랐다.
  • “왜? 말을 못하겠다 이거야? 흥, 이틀 전이라면 네 프로포즈에 감동이라도 받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드래곤 사령관님에게서 초대장을 받은 몸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곧 상위층이 될 거란 말이지. 네 까짓 거지놈이 그 푼돈으로 나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이 알면 빵 터지겠네!”
  • 서강묵은 할 말을 잃었다.
  • ‘내 초대장을 받았다고 구세주라도 만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 하지만 그 구세주는 바로 그였다.
  • 서강묵은 화가 났지만 잘못한 게 있는 입장이라 소영미에게 자신이 바로 그 드래곤군 사령관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 이때, 말없이 옆에 앉아 있던 소우희가 참다못해 나섰다.
  • “영미 언니, 강묵 씨가 왜 언니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5년 동안 구애한 것도 그렇고, 월급 모두를 언니에게 주고 제대하자마자 찾아온 것도 그렇고, 이런 남자는 아주 드물어. 돈이 많지 않다고 하지만 적어도 성의는 있잖아. 나무 팬던트를 일단 받고나서 결혼할지 말지 생각해도 되잖아.”
  • 그제야 서강묵은 소우희의 존재를 발견하고 고마운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소우희는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얼굴과 몸매 모두 소영미보다 훨씬 월등했다.
  • 소우희는 진심을 5년간 쏟은 서강묵이 다른 남자의 앞에서 굴욕적인 모습으로 있는 게 싫어서였다.
  • 하지만 예상과 달리, 소영미는 서강묵의 5년간 월급을 받아서 쓴 걸 감안하지 못하고 바로 화를 냈다.
  • 소영미가 소우희를 데리고 진호비를 만나러 온 것은 진호비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소우희를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랐다. 그녀는 사령관의 퇴임 파티 초대장을 받을 사람이니 진호비는 그녀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소우희를 깔아뭉개려고 데려온 것이었다.
  • “소우희, 내가 너처럼 아무나에게 막 몸을 던지는 사람인 줄 안 거야? 넌 미혼모에 애아빠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5년 전 겨울에 어느 남자랑 뒹굴었던 거야? 네 아빠가 하도 사정사정 해서 별장을 바꿔 줬더만. 네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 소영미의 수다스러운 목소리에 서강묵은 머리가 멍해졌다.
  • ‘5년 전 그날 밤의 여자는 소영미가 아니라 지금 내 편을 들고 있는 소우희라는 여자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