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현은 전화를 끊었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그의 모습에는 걱정과 초조함이 여실히 드러났지만, 이는 그의 아내에 대한 감정은 아니었다.
심가희는 차갑게 그를 밀어냈다.
"먼저가 봐. 그녀는 너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인 것 같으니까."
이렇게 말은 내뱉었지만, 마음은 비수가 꽂힌 듯 아팠다.
여승현은 무슨 말을 더 하려 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택시를 잡아서 그녀를 차에 태운 후 서둘러 떠났다.
심가희는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는 남자와의 혼인을 혼자서 끌고 간들 그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에 돌아온 뒤, 도우미가 심가희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듣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블랙 화이트 계열의 침실에서 갑자기 자신이 마치 허수아비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결혼은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한 듯했다. 이젠 이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은 정말 끝내야 할 날이 온 것 같았다.
심가희는 여승현을 밤새 기다렸다.
그러나 그에게서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이런 차가운 무관심은 뾰족한 바늘처럼 심가희의 명치끝을 파고드는 듯했다.
“아가야, 엄마가 너에게 온전한 가정을 주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엄마가 앞으로 아빠 몫까지 너를 더 많이 사랑할 거야."
그날 밤, 심가희는 눈물을 흘리며 프린트해놓은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한 획 한 획 적을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칼로 난도질당하여 피가 철철 넘치는 듯 아팠다.
심가희는 사인을 해놓고, 여승현한테서 받았던 결혼반지도 빼서 이혼 협의서 위에 올려놓았다.
전에 그녀는 이 반지를 보배처럼 여겼었다. 3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반지를 빼지 않았던 터라 반지를 빼자 그녀의 손가락에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여승현에 대한 그녀의 사랑처럼 깊은 흔적을 남겼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심가희는 자신이 바보처럼 다시 마음이 약해질까 봐 마음을 굳게 먹고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사모님, 소희 씨가 몸이 안 좋아서 대표님이 옆에서 돌봐 주고 있어요. 대표님이 저희한테 사모님이 출국하시는 것을 배웅해드리라고 하셨어요. 지금 가시죠.”
심가희가 문을 나서자마자 여승현의 경호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경호원이 그녀에게 한마디 했는데 이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내가 왜 외국에 가? 난 안 가."
"죄송합니다. 사모님, 대표님이 사모님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경호원은 말을 마치자마자 심가희 앞으로 다가가 기절시킨 후 그대로 차에 태웠다.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창고로 끌려갔다. 그리고 옷이 벗겨진 채 정체 모를 남자한테 애무당하고 있었다. 옆에 카메라는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각종 민망한 포즈를 취한 그들을 찍고 있었다.
"소희 씨, 원하시는 대로 진행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한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소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좋아. 이 사진들을 얼른 인터넷에 올려. 승현이는 바람피운 여자를 절대 아내로 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잊지 말고 마무리까지 깨끗이 처리해."
"알겠습니다."
남자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창고 주위에 휘발유를 붓더니 불을 질렀다.
치솟은 불꽃이 확 타오르기 시작하자, 주변을 질식시킬 듯 화염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가희가 기절한 상태에서 깨어나자 주위는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짙은 연기 때문에 그녀는 입을 벌리지 못했고, 화염은 그녀를 향해 삼킬 듯이 더욱 무자비하게 활활 타올랐다.
“살려 줘! 살려 줘!”
심가희는 알몸인 자기 모습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한쪽 막대기를 휘둘러 창고 문을 다급히 두드리자 그때 밖에서 경호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이 모든 것은 대표님이시키신 일입니다. 편히 가십시오. 대표님이 좋은 묫자리를 준비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심가희는 순간 행동을 멈추었다.
‘여승현이 날 죽이라고 했다고? 도대체 왜? 한소희가 나와 같이 임신해서? 한소희한테 사모님 자리를 내어주고 그녀의 아이가 이 세상에 당당히 태어나게 하려고? 여승현, 너 참 독해! 자신의 피붙이도 용납하지 못한단 말이야?’
심가희는 깊은 슬픔에 잠겨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여승현, 널 증오해! 이번 생은 내가 운이 없어서 너같이 차갑고 매정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꼭 너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할 거야!”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매정하게 그녀의 말을 삼켰고 그녀는 호흡이 가빠오고 눈꺼풀이 무거워져 더는 버티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맹렬한 불길이 그녀의 연약한 피부를 태웠고 그녀의 영혼도 삼켜버렸다…
5년 후.
비서 송율은 손에 쥐고 있던 자료를 여승현에게 건네주었다.
“대표님, 미국 한정그룹에서 보내온 디자이너의 자료인데 오늘 해성시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저희가 사람을 보내서 모시고 올까요? 이 디자이너는 해외에서도 유명하고 그가 디자인한 스포츠카는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예요. 만일 이번에 저희가 한정그룹과 협력하지 않았으면 한정그룹에서 캐슬린 디자이너를 우리한테 기술지도를 위해 보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캐슬린?
여승현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네, 디자이너 캐슬린입니다.”
송율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캐슬린 디자이너는 최근 2년 사이에 떠오르는 신예 스포츠카 디자이너로서 그녀가 첫 번째로 디자인한 '사랑의 날개' 스포츠카는 단번에 국제 디자이너대회에서 1등 상을 거머쥐며 이 스포츠카는 출시되기도 전에 벌써 돈 많은 권력가들이 앞다퉈 경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캐슬린은 단 2대만 세상에 내놓겠다고 하여 놀랄 만큼 비싼 가격으로 치솟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돈을 들고 그녀를 찾아간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정그룹과의 협력으로, 캐슬린이 직접 해성시에 온 것이다. 또한 여승현이 스포츠카를 여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알고 있던 송율은 캐슬린을 항우그룹에 영입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