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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나한테 수작을 부리지 마!

  • 초인종이 계속 울렸지만 심가희는 못 들은 듯 그냥 나른하게 누워있었다. 그러면서 한소희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사과하러 온 모습을 상상했다.
  • 그때 그녀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깨어난 뒤 첫 날벼락은 인터넷상의 욕설이었다. 그녀가 남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진,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고 사람들이 퍼붓는 저주에 그녀는 살아갈 용기마저 잃을 뻔했다. 만약 심재민의 존재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 큰불 속에서 죽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욕설에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게 한소희가 저지른 짓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 그녀의 결혼을 망가뜨리고, 여승현에게 몰래 아이를 낳아주고, 그녀에게 그런 오명을 뒤집어씌운 한소희는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엔 역부족이지만, 심가희는 지금 서둘러 한소희와 끝을 볼 생각이 없었다.
  •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삶는 것도 사실 재미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 여기까지 생각하자 심가희의 입꼬리가 가늘어지며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여승현은 오랫동안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기척이 없자 사람이 없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서기에는 달갑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기어이 나수영의 집에 심가희가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집념뿐이었다.
  • 초인종이 10분이나 울려서야 심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 그녀는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몸매를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맨발로 문을 열며 무심하게 말했다.
  • “누구세요? 예의도 없이.”
  • 여승현은 갑자기 멍해졌다.
  •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행동에 여승현은 아내가 떠올랐다.
  • “가희…”
  • 그는 무의식 간에 중얼거렸고 심가희는 그 자리에서 어리둥절해졌다.
  • ‘어떻게 이 사람이?’
  • 나수영의 집에 있으면 여승현의 의심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승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
  • 당황한 눈빛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고 부자연스럽게 옷깃을 당긴 뒤 한번 기침을 하며 말했다.
  • “대표님? 어떻게 오셨어요?”
  • 대표님이라는 말에 여승현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 가느스름하게 뜬 그의 눈은 엑스레이처럼 심가희의 몸을 꿰뚫을 듯이 훑어보았다.
  • 심가희는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지만, 애써 웃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 “대표님, 그 눈빛은 오해받을 수 있어요. 만약 그 미래의 대표 사모님이 이 장면을 보면 제가 또 봉변을 당할 것 같은데요.”
  • “당신 도대체 누구야?”
  • 여승현은 심가희와 시간을 끌 생각이 없어서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예전에 심가희가 가장 무서워한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이 눈빛이었다. 비록 이미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려워서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여승현의 눈을 마주 보았다.
  • “대표님이 보시기엔 제가 누구 같아요?”
  • 그녀의 웃는 얼굴은 꽃처럼 아름답고 눈빛은 수정처럼 맑아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 만약 다른 여자였다면 여승현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심가희는 그에게 너무나도 많은 의문을 안겨 주었다.
  • 여승현은 불쑥 앞으로 나서며 심가희를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 “심가희 씨, 수작을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나 여승현은 남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를 건드리면 당신은 뼈도 추리지 못할 각오를 해야 할 거예요.”
  • 그와 그녀의 거리는 너무나도 가까워서 서로 상대방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심가희는 긴장해서 두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얼굴은 더 눈부시게 웃었다.
  • “대표님이 지금 저를 희롱하는 거예요? 아니면 당신들 항우그룹이 인재를 붙잡아 두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에요?”
  • “심가희, 여기에 온 목적이 뭐야? 이곳이 내 아내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마. 너와 내 아내는 같은 이름을 가졌고 모두 나수영을 알고 있는데 이게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 여승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 그의 따뜻한 입김이 심가희의 얼굴에 뿜어졌다. 심가희는 그의 셔츠 안에 있는 왕성한 가슴 근육의 힘까지 느껴졌다.
  • 그는 여전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양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 심가희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 “대표님의 아내요? 그 한소희 씨를 말하는 거예요?”
  • 그녀는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그녀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맑은 샘물처럼 깨끗했다.
  • 여승현은 가슴이 덜컥 흔들렸다.
  • ‘이렇게 익숙한 눈빛, 이렇게 익숙한 눈동자가 심가희가 아니면 누구라는 말인가? 그런데 왜 인정하지 않을까? 왜 그 얼굴이 기억 속의 얼굴이 아닐까? 설마 그 큰불 때문에?’
  • 여승현은 갑자기 팔을 뻗어 심가희의 옷깃을 잡아서 무의식중에 아래로 끌어내렸다.
  • 심가희는 기절하리만치 놀랐다.
  • “여승현, 뭐 하는 거야? 경고하는데 다시 한번 함부로 행동하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 옷깃을 꽉 틀어잡고 있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땀이 다시 배어 나왔다.
  • ‘그가 제멋대로 하게 놔둘 수 없어!’
  • 지난 5년 동안 그녀는 수없이 성형했지만, 몸에 난 화상은 여전히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 그녀는 여승현이 자기를 의심하며 자기에 대해 알아볼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 어떻든 간에 그녀는 한정그룹의 디자이너가 아닌가?
  • 심가희의 당황한 눈빛에 여승현의 눈동자가 멈칫했다.
  • “내가 뭐할 것 같아? 과연 이게 당신 목적이 아니었어?”
  • 말을 하는 동안에 여승현은 손에 힘을 살짝 더 주며 거리낌 없이 광적인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