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이 계속 울렸지만 심가희는 못 들은 듯 그냥 나른하게 누워있었다. 그러면서 한소희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사과하러 온 모습을 상상했다.
그때 그녀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깨어난 뒤 첫 날벼락은 인터넷상의 욕설이었다. 그녀가 남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진,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고 사람들이 퍼붓는 저주에 그녀는 살아갈 용기마저 잃을 뻔했다. 만약 심재민의 존재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 큰불 속에서 죽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욕설에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게 한소희가 저지른 짓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녀의 결혼을 망가뜨리고, 여승현에게 몰래 아이를 낳아주고, 그녀에게 그런 오명을 뒤집어씌운 한소희는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엔 역부족이지만, 심가희는 지금 서둘러 한소희와 끝을 볼 생각이 없었다.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삶는 것도 사실 재미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심가희의 입꼬리가 가늘어지며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승현은 오랫동안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기척이 없자 사람이 없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서기에는 달갑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기어이 나수영의 집에 심가희가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집념뿐이었다.
초인종이 10분이나 울려서야 심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그녀는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몸매를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맨발로 문을 열며 무심하게 말했다.
“누구세요? 예의도 없이.”
여승현은 갑자기 멍해졌다.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행동에 여승현은 아내가 떠올랐다.
“가희…”
그는 무의식 간에 중얼거렸고 심가희는 그 자리에서 어리둥절해졌다.
‘어떻게 이 사람이?’
나수영의 집에 있으면 여승현의 의심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승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
당황한 눈빛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고 부자연스럽게 옷깃을 당긴 뒤 한번 기침을 하며 말했다.
“대표님? 어떻게 오셨어요?”
대표님이라는 말에 여승현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가느스름하게 뜬 그의 눈은 엑스레이처럼 심가희의 몸을 꿰뚫을 듯이 훑어보았다.
심가희는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지만, 애써 웃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대표님, 그 눈빛은 오해받을 수 있어요. 만약 그 미래의 대표 사모님이 이 장면을 보면 제가 또 봉변을 당할 것 같은데요.”
“당신 도대체 누구야?”
여승현은 심가희와 시간을 끌 생각이 없어서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전에 심가희가 가장 무서워한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이 눈빛이었다. 비록 이미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려워서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여승현의 눈을 마주 보았다.
“대표님이 보시기엔 제가 누구 같아요?”
그녀의 웃는 얼굴은 꽃처럼 아름답고 눈빛은 수정처럼 맑아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만약 다른 여자였다면 여승현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심가희는 그에게 너무나도 많은 의문을 안겨 주었다.
여승현은 불쑥 앞으로 나서며 심가희를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심가희 씨, 수작을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나 여승현은 남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를 건드리면 당신은 뼈도 추리지 못할 각오를 해야 할 거예요.”
그와 그녀의 거리는 너무나도 가까워서 서로 상대방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심가희는 긴장해서 두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얼굴은 더 눈부시게 웃었다.
“대표님이 지금 저를 희롱하는 거예요? 아니면 당신들 항우그룹이 인재를 붙잡아 두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에요?”
“심가희, 여기에 온 목적이 뭐야? 이곳이 내 아내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마. 너와 내 아내는 같은 이름을 가졌고 모두 나수영을 알고 있는데 이게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여승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의 따뜻한 입김이 심가희의 얼굴에 뿜어졌다. 심가희는 그의 셔츠 안에 있는 왕성한 가슴 근육의 힘까지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양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심가희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대표님의 아내요? 그 한소희 씨를 말하는 거예요?”
그녀는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그녀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맑은 샘물처럼 깨끗했다.
여승현은 가슴이 덜컥 흔들렸다.
‘이렇게 익숙한 눈빛, 이렇게 익숙한 눈동자가 심가희가 아니면 누구라는 말인가? 그런데 왜 인정하지 않을까? 왜 그 얼굴이 기억 속의 얼굴이 아닐까? 설마 그 큰불 때문에?’
여승현은 갑자기 팔을 뻗어 심가희의 옷깃을 잡아서 무의식중에 아래로 끌어내렸다.
심가희는 기절하리만치 놀랐다.
“여승현, 뭐 하는 거야? 경고하는데 다시 한번 함부로 행동하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옷깃을 꽉 틀어잡고 있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땀이 다시 배어 나왔다.
‘그가 제멋대로 하게 놔둘 수 없어!’
지난 5년 동안 그녀는 수없이 성형했지만, 몸에 난 화상은 여전히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여승현이 자기를 의심하며 자기에 대해 알아볼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 어떻든 간에 그녀는 한정그룹의 디자이너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