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정현우
- 몇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다가오자, 킬러 출신인 임아리는 그들로부터 익숙하고도 약간은 그리운 기운을 느꼈다.
- 물론 그녀가 느낀 것은 그들 몸에 배어 있는 살기였다.
- 하지만 이들은 흑룡의 문턱에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알 가치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 “이쪽으로 어떤 남자가 지나가는 거 못 봤어?”
-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총을 숨기며 싸늘한 어조로 임아리에게 물었다.
- 옆으로 몸을 돌리고 발로 바닥의 흙을 파내는 임아리는 마치 진흙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였다.
- 장마철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최근에 자주 비가 내려도 약간씩 내리기만 했기에 땅은 언제나 축축했다.
- 임씨 집안 담장 밖은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은 흙길이었고, 담장 기초를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해 두꺼운 흙이 쌓여 있었다.
- 임아리는 차분한 모습으로 발로 흙을 긁어내며,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보는 눈앞에서 남자가 남긴 혈흔을 덮어버렸다.
- 사내들은 공기 중에 퍼진 물푸레나무 향과 거기에 섞인 비릿한 피 냄새를 맡으며 임아리를 더욱 의심스럽게 여겼다.
- 그들이 다시 캐물으려는 순간, 뚱뚱한 소녀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 “저쪽으로 갔어요.”
- 사내들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임아리를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서둘러 그쪽으로 뛰어갔다.
- 임아리는 정원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 정도훈은 임씨 집안의 뒷문을 통해 도망친 후, 곧바로 정씨 가문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상처를 치료하고 밤새 서원시로 돌아갔다.
- 서원시, 정씨 가문.
- 정도훈은 정씨 가문의 동남쪽 별채에 머물렀다. 저택의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삼촌을 만날 준비를 했다.
-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왔을 때 남자는 이미 다리를 꼬고 아래층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 “삼촌.”
- 정도훈은 정중하게 남자 앞에 섰다.
- 이미 이튿날 새벽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는 단정한 외모에, 맞춤 제작한 회색 문양의 양복을 입고 있어 고풍스러운 포스를 자아냈다. 그의 강렬한 존재감은 홀에 있는 모든 부하들과 정도훈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 그 남자는 바로 정씨 가문 현재의 집권자인 정현우였다.
- 그는 은퇴한 정씨 가문 회장의 늦둥이 아들이다.
- 비록 정씨 가문의 손아랫사람들이 그를 공손하게 삼촌이라고 부르지만, 정현우는 이제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 “삼촌, 어떻게 직접 오셨어요?”
- 일이 잘못되자 정도훈은 등골이 서늘해져 남자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 “저의 무능함 때문에 이런 사소한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요. 물건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 저도 이런 꼴이 되어 버렸네요.”
- 정도훈은 매우 안타까웠다.
- 정현우는 자신과 같은 나이였을 때 이미 모든 것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었고, 손바닥 뒤집듯이 상황을 바꾸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모두가 그를 ‘삼촌’이라고 공손하게 불렀다. 그런데 자신을 돌아보니…
- “날이 밝으면 가서 벌을 받겠습니다.”
- 정도훈은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 그때 정현우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는 정씨 가문의 사람이야. 경호원이나 킬러도 아닌데 처음 미션을 나갔으니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 무사하게 돌아왔으면 됐어.”
- 정현우는 늘 아랫사람들에게 관대했다.
-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정도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 “상처는 어때?”
- 그러자 정도훈이 서둘러 대답했다.
- “급소는 피했어요. 총알은 이미 제거했으니 며칠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 붕대를 감은 배를 감싸며 말하는 정도훈의 팔에 적힌 숫자가 정현우의 눈길을 끌었다.
- “그건 뭐지?”
- 정현우는 정도훈이 중요한 정보라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 정도훈은 고개를 숙여 혈흔을 지우려 손을 씻을 때도 숫자가 지워질까 봐 조심했던 것을 떠올렸다.
- 삼촌의 질문에 그는 서둘러 설명하기 시작했다.
- “물건은 청산시 교외에서 빼앗겼어요. 위급한 상황에서 쫓기고 있을 때 한 어린 아가씨한테 도움을 받았는데, 이 은행 계좌는 그 아가씨가 적어준 겁니다.”
- “오호, 젊은 아가씨라.”
- 정현우는 별로 흥미가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 “네, 아직 학생인 것 같았는데, 안 죽고 살아남으면 이 계좌로 돈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 그 대담하고 침착한 소녀가 정도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도와드릴까요?”
- “급소를 찔리진 않았으니 죽진 않을 거예요. 물론, 30분 안에 지혈하지 않으면 보장할 수는 없어요.”
- “여기로 들어가서 뒷문으로 도망쳐요.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았으면 이 계좌로 돈 보내는 거 잊지 말고요.”
- 임아리가 그에게 했던 세 마디와 그의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계좌를 적어주었던 행동이 정도훈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정말로 특별한 소녀였다.
- “물건은 이미 사람을 보내 추적 중이니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얼른 올라가서 푹 쉬고 있어. 그자들이 잡히면 네가 처리하도록 보낼게.”
- 정현우는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했다.
- 정도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정현우가 대문을 나서기 직전에 그를 뒤쫓아가 물었다.
- “삼촌, 저, 청산시에 가서 그 여학생한테 직접 감사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 “그건 네 일이야.”
- 정현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몇 걸음 더 걷다가 멈추고는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네가 정씨 가문의 사람이란 건 잊지 마. 지금 많은 눈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청산시 같은 작은 곳에서 일을 크게 벌이면 그 여학생한테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어. 감사를 어떻게 할지 방법을 알려줬잖아.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
- “네, 조언 감사합니다.”
- 정도훈은 약간 아쉬웠다.
- “이 기간 동안 회사에 가지 말고 집에서 몸조리나 잘해.”
- “저는 괜찮습니다.”
- “만약 답답하다면 할아버지를 수술할 수 있는 의사나 찾아보거나, 병을 완화할 방법이라도 찾아보는 게 좋겠어.”
- “네.”
- 마샤가 죽었으니 그들은 할아버지도 거의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정현우를 배웅한 후, 정도훈은 위층으로 올라가 종이에 따로 적어놓은 계좌번호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 ‘얼마를 보내면 좋을까?’
- 목숨을 빚졌으니 얼마를 보내든 상관없지만, 아직 학생인 만큼 너무 많은 돈을 보내면 오히려 놀라거나 불편해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 ‘괜히 그 여학생한테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 아무리 배짱이 좋아도 아직 10대인 학생이니 수천억을 보내면 혼자서 처리하지 못할 것 같았다.
- 임아리는 잠에서 깨어나 평소처럼 아침 운동을 마치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자, 임지호가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받아.”
- 임지호가 만 원짜리를 건네자 임아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 돈을 받지 않고 눈빛으로 무슨 돈이냐는 듯 물었다.
- “학식 카드에 돈 없잖아.”
- 임지호의 말에 임아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돈을 받았다. 손에 든 만 원짜리를 보며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 마샤 시절에는 원하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돈을 흥청망청 써도 아깝지 않았는데, 이제는 남동생이 준 만 원으로 생활해야 하다니.
- “어디서 났어?”
- “엄마한테 학식 카드에 돈이 없다고 얘기했어.”
- “그럼 너는?”
- “내 학식 카드엔 아직 몇천 원 정도 남았거든.”
- 임아리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교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임지호를 따라가며 물었다.
- “내 학식 카드에 돈이 없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 “예전엔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한테 돈 받아서 충전했잖아. 이번에는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돈 달라는 얘기를 하지 않더라고.”
- 임아리는 아무 말 없이 임지호가 신고 있는 색이 바래고 다 떨어진 운동화를 보면서, 남동생이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 청산고.
- 염희주는 학교 건물 옥상에서 느긋하게 등교하는 임아리를 내려다보며 눈에 독기를 띄웠다.
- “사람은 찾았어?”
- 염희주가 옆에 있는 여학생에게 물었다.
- “걱정 마. 오늘 밤이면 저 뚱땡이가 우릴 건드린 대가가 어떤 건지 알게 될 테니까.”
- 지난번에 물에 흠뻑 젖은 여학생이 이를 갈며 얘기했다. 벌써부터 임아리가 무릎 꿇고 빌게 될 모습이 기대됐다.
- “흥.”
- 염희주는 양팔로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 ‘돼지 년 주제에 감히 나한테 겁을 줘?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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